부여 서씨 광석리 집성촌
부여 서씨 광석리 집성촌(扶餘 徐氏 廣石里 集姓村)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부여 서씨 집성촌. 족보에 의하면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인 부여융(서융)(徐隆)이지만, 문중은 고려 시대에 병부 상서를 지낸 서존(徐存)을 시조로 본다. 후손은 주로 평안남도 개천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부여 서씨 전체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4,486가구 1만 4312명이었다.
부여 서씨 광석리(廣石里) 집성촌의 입향조(入鄕祖)는 서존의 17세손인 육곡(六谷) 서필원(徐必遠)[1614~1671]이다. 서필원의 집안은 16세기 이래 중앙의 훈척(勳戚) 집안과 혼인해 두각을 드러내고 점차 명문가로 발돋움한 경기도 지방 가문이었다. 서필원은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 계열 중에 국왕 중심의 정치를 추구한 김육(金堉)의 한당(漢黨)에 속하였으며, 사림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는 송시열(宋時烈) 계의 산당(山黨)을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후일 소론(小論)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서필원의 묘는 현재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광릉촌에 있는데, 이곳은 원래 효종의 사위인 인평위(寅平尉) 집안에 내려진 땅이었지만 현종이 서필원의 공적을 감안해 묏자리로 특별히 하사하였다. 한편 후에 서필원에게 정의(貞毅)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부여 서씨 문중의 인물로는 유일한 일이었다. 따라서 부여 서씨 문중은 정의공파(貞毅公派)를 만들어 이를 기념하고 있다. 집성촌은 18세기 중반에 서필원의 6세손인 서재록(徐在祿)[1742~1820]이 5대조인 서필원 등 선대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논산을 떠나 서필원의 묘소 옆으로 이주했던 1770년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7~8대를 거치면서 양주 및 서울·경기도 파주시·경기도 연천군 일대에서 혼인하며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조사한 양주 지역 54개 집성촌에 포함되지 않았다. 1977년 14가구[광적면 전체], 1992년 약 15가구였다. 해방 이후 집성촌이 한창 번성하였을 때는 30호에 달하였으나 2010년 7가구가 거주하다가 2011년 현재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종손 등 3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과거에서 이어지는 혼맥(婚脈)을 유지하고 있다. 주요 행사는 매년 음력 10월 4일 지내는 시제(時祭)이며, 양력 8월 15일 전후에 벌초를 한다. 선산에 약 30기의 묘가 있다. 종손인 서형관은 현재 『육곡집(六谷集)』, 『인척가계초』 등 다수의 고문헌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