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사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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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사롱사(四聾祠)

세조가 단종으로 부터 강제로 왕위를 양위받자,  서호(徐顥(灝). 남원부사. 정 3품. 전남도지사.차관.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정 2품. 장관)의 큰 아들인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은  벼슬을 버리고,남평 본집에 돌아와 세 아우들과 사룡사를 구축하고 은퇴하여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 

아우인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서효당(徐孝堂. 익롱공(益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이 그 말을 듣고, 의리에 합당한 일이라고 여기고 역시 맏형을 따라 듣는 것을 피하는 귀머거리가 되니, 당시 마을 사람들이 사롱(四聾)이라 하였다. 또한 호도 귀머거리 롱(聾)자를 써서,예롱(豫聾),수롱(隨聾),점롱(漸聾),익롱(益聾)이라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과 추광 남효원과 송백지교를 맺고, 서로가 모여서 시를 수창한 일이 많았다. 조선 세조 4년 서기 1458년 10월 24일에 단종이 사약을 받았다. 이에 매년 10월 24일이면 단을 만들어 영월땅을 바라보며서 세 아우들과 같이 곡을 하니,당시 이를 꺼리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여러번 곤경에 당하였다. 항시 파양자(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고 살았는데, 세조가 벼슬길에 나와달라고 여러번을 불렸으나 나가지 않고, 각동리에 은거하였다.

사롱사(四聾祠)가 있던 곳은 지금은 밭이 되어 있으나,50년 전만해도 주춧돌이 나왔다 한다. 마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는데,호랑이가 많이 나와 유지되지 못하고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