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구
서가구(徐家溝)
번한서인(番韓徐印)
단군 조선의 서남방인 번한조선(番韓朝鮮)은 중국과 경계에서 항상 전쟁하면서 발전하였다.
치우가 내몽고 구려 청구국에서 태산으로 내려가서 용산문화를 만들고 중국 묘족(苗族)의 조상이 되었고, 발한성에 남았던 치우의 후손이 번한이 되어서, 회대까지 다스렸는데 그후 번한은 태산에서 물러나오고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백제, 고구려가 뒤를 이었다.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을 세습하고, 번한이 죽자 소정을 추천했는데 단군 소태가 그리하였다.
그러나 상장 서우여가 소정을 죽였다.
소태 단군은 상장 서우여에게 살수의 백리 땅을 주어 기수(奇首)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또 서우여에게 단군 자리 양위를 계획하였다.
그러자 색불루가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왔다. 이때 마한이 출병하였으나 해성(평양)에서 전사하였다. 서우여는 도망하였다.
색불루가 단군이 된 뒤에 쫓겨났던 서우여가 다시 좌원坐原에 돌아와서 색불루가 세운 번한 개천령을 전사시키니,
색불루는 서우여와 타협하여 번한으로 세운다.
그리고 마한이었던 여원흥의 후손은 대동강에서 물러나와 막한이 되어 왕검의 유택이 있는 고리국지, 즉 창무시 부근에서 40여세를 이어간다.
이때 막한 여원흥의 유물이 법고시 정가방丁家方 만류가灣柳家의 유적이다. 유물은 부채형 동월銅鉞, 동척銅戚, 동부銅斧 2건, 단뉴동경 등이 있고, 하북성 초도구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영수동도鈴首銅刀, 녹수동도 鹿首銅刀, 환수동도環首銅刀 외 두 건의 동도가 있다. 이 유물들은 전단군시대 말기 무렵, 은나라 시대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된다.
색불루가 세웠던 마한은 막한莫韓, 막조선莫朝鮮으로 바뀌어서 북으로 후퇴하여 말갈의 조상이 된다.
여기서 좌원坐原은 삼국사기 고구려에도 나오는데 부신시 동북쪽 고원으로 고려된다.
대릉하의 백악산 아사달 유역(오한기 대전자진)은 당시 개성開城으로 고려된다.
이후로 번한세가의 적통이 치씨에서 서우여로 바뀌었는데 이를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고도 한다. 기존의 번한과 마한이 모두 서우여의 기자조선에 속하였다.
단군 소태가 처음에 기자 서우여에 주었던 살수(薩水)의 땅 백리는 무순시 고려산성이다. 요동반도 최초의 청동기가 나오는 곳이다.
무순시 망화구에서 산서성의 은묘에서 나온 것과 유사한 청동환수도가 발굴되었으므로 은나라 때에 해당하는 유적지다. 바로 단군 소태와 서우여 기자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시 청동도 길이는 24cm였고 모양은 위 그림중의 첫 번째의 날을 가졌으나 손자루에는 원형고리가 있다.
이후 무순시에서 초기 비파형청동검(비파의 상하가 1:1에 가까운 것)이 나왔다. 이 초기 비파검은 요양에서도 나왔다.
즉, 뒷날에도 지금의 요하 동쪽 일대가 서우여 기자조선의 배후가 된다.
[단기고사]에서 기자조선의 수도는 평양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번한(번조선)의 왕험성을 의미한다.
전한의 요동군에는 번한성과 험독성이 있었다. 요동군 번한현에서는 패수가 색외에서 나와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가므로 그 위치는 지금 중국이 험독성이라고 주장하는 태안현 손성자다.
전단군조선의 번한은 극성에 있었고 탕지산 안덕향이라고도 했으며 그 위치는 당취수가 흐르던 수중현의 홍애자 고성이었다.
서우여의 번한성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 서우여의 영역이다.
기자조선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의 영역이었다. 무순시가 기자가 책봉받았던 고향이므로 심양에서 아래와 같은 기자 시대 번한왕의 고분 발굴이 있었다.
서우여 번한의 특징적인 문화는 바로 비파형 청동검과 다뉴동경多紐銅鏡, 그리고 천단, 즉 고인돌이다.
은나라 동경은 고리가 하나인데 반하여 번한의 동경은 고리가 둘이므로 다뉴동경이라고 한다.
번한의 관내인 의현義縣에서는 비파형 청동검이 6개 발굴되었고, 부신시 자도대 호두구 유지에서는 3개의 비파형 청동단검 석곽묘와 석성이 발굴되었다. 대집둔 험독성險瀆城의 서쪽 오금당에서는 청동단검 4개, 또 서쪽인 흥성시 양하향에서는 은말 시기의 환수청동도 등 청동도 4개가 발굴되었다. 이는 막한의 유물과 거의 같다.
서우여의 서쪽 영역은 대릉하大凌河 상류인 객좌喀左, 능원, 우하량까지로 고려되며 동남쪽으로는 한반도까지 통할한다. 이때 고인돌이 한반도에 퍼진 것이다.
2. 비파형 청동검의 발전
철기시대이고 철검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부장된 것은 청동검이다. 이는 더 강하고 오래가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파형 청동검의 분포 통계를 보면 총 218개 지점(비파형검의 갯수가 아님, 요서에서는 한개소의 3,4개의 검이 나옴.)에서 발현되었는데, 한반도는 7~8개소로서 전체의 3.2%다. 반면에 요서는 154 개소로서 70%, 요동과 심양이 45개소로서 21%, 길림장춘이 6개소로서 2.8%. 하북이 6개소로서 2.8%이다. 이는 서우여 기자조선시대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한반도 출토지는 평남 개천군 용흥리, 평양시 서포동, 평남 대동강면 석암리, 연안군 부흥리,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춘천시 외곽, 경북 청도군 예전리 등이다.
먼저 북방 청동검 중에서 동군(東群)이라 하는 것은 전형적인 비파형 청동검이다. 이것은 조립식 원리로 인해서 타격석에 청동검을 돌려서 끼워 사용했는데 후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자루에 끼웠다. 조립식으로 만든 이유는 기마전에서 나무 자루에 달아매어 창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고려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비파형 청동검이 개발된 곳은 무순시, 요양시 등이다. 이제까지의 한쪽날의 청동도(靑銅刀)를 나무 자루에 달아서 창으로 쓰다가 양쪽날의 청동검(靑銅劍)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동군의 비파형 청동검은 난하 서쪽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동군 세력의 중심인 서우여의 패전 이후로 서우여기자조선에서만 사용되었고 그리하여 한반도와 길림으로 전파되었으며 또 진조선(眞朝鮮)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서우여 기자 번한성은 bc221년 동호에 인질로 잡혀왔던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이때 연나라 요동군이 되었다. 연나라와 번한(번한조선)의 새로운 경계는 만번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훗날 위만의 번한성으로서 금주시 동쪽이다. 즉 대릉하를 경계로 연나라와 기자조선의 경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진나라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고 그래서 상하 운장이라고 했다. 운장은 낙랑군에 있었는데, 전한서의 낙랑은 한무제 때의 낙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후 후퇴한 낙랑군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렇게 옮겨온 낙랑을 훗날 낙도 樂都나 낙랑서현樂浪西縣, 서락현西樂縣 등으로 달리 부른 것이 된다. 아무튼 한무제의 낙랑군 설치시에는 요동군 험독현에 속했고, 후한시대에는 요동속국의 하나로서 험독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