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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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현(稷山縣)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직산현(稷山縣)에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다. 백제(百濟)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의 사당인 온조왕묘(溫祚王廟)가 직산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 세종 11년 기유 7월에 비로소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세우고,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백제 시조(百濟 始祖) 온조왕(溫祚王)이 18년 계묘에 국도(國都)를 직산현(稷山縣)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13년 을묘에 이르러 온조왕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보니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기름지고 걸으니, 마땅히 여기 광주목(廣州牧)에 도읍을 세워서 장구한 계교를 도모하고자 하노라.”하고, 드디어 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광주목(廣州牧)으로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였다. 1429년 5월 7일 호조에서 충청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제 하교(下敎)를 받자와 백제 시조(始祖)의 묘우(廟宇)를 이미 직산현(稷山縣)에 세웠으니, 청하건대 평양부(平壤府)의 기자전(箕子殿)에 따라 본 고을의 노비(奴婢) 각 2인을 정하여 이를 지키게 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37년 3월 13일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 별감(巡審 別監)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악(嶽)·해(海)·독(瀆)·산천의 단묘(壇廟)와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정하기를“나라에서 행하는 직산현(稷山縣)의 백제 시조는 중사(中祀)이고, 사묘(祠廟)의 위판(位版)은 백제 시조라 쓴다.”하였다. 1451년 9월 16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 직산(稷山)에 있는 백제(百濟) 시조묘(始祖廟)가 해가 오래 되어 무너져 허물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소재지인 직산과 각 고을로 하여금 협력해 수즙(修葺)하게 하소서.”하니, 문종이 그대로 따랐다.1603년 6월 1일 충청 감사 류근(柳根)이 백제(百濟)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왕릉을 직산(稷山) 땅에 세우자고 청하니, 선조가 따랐다.

1636년 12월 25일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따랐다.1639년 2월 2일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온조왕(溫祚王)을 제사하고 위판(位版)을 고쳐 써서 ‘백제 시조왕(百濟 始祖王)’이라 칭하였다.예조에서 ‘우리나라의 사서(史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모두 온조왕(溫祚王)으로 썼는데, 세대가 멀어져서 명호 및 시호를 분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위판에 쓰자고 했는데, 인조가 답하기를, “온조는 이름인 듯한데, 위판에 바로 쓰는 것이 어떠한가?”했다. 예조가 ‘백제 시조(百濟 始祖)’라고 쓰기를 청하니, 인조가 ‘왕(王)’자를 더 써 넣도록 명하였다. 1674년 1월 21일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앞으로 능에 거둥하실 때 남한산성을 숙소로 삼으셔야 하는데, 성 안에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사당이 있으니 제사를 올려야 할 듯합니다.”하니, 현종이 유사에게 이르라고 명하였다.1695년 4월 17일 숙종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역대 시조(始祖)의 제향(祭享) 축문의 칭호(稱號)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건의(建議)하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온조왕(溫祚王) 제사 축문(祝文)에 온왕(溫王)이라 칭하였는데, 만일 그 성(姓)을 들어서 칭한다면 마땅히 고(高) 자를 칭하여야 하고, 만일 그 당시의 고질(古質)한 칭호를 따라서 그 이름을 든다면 마땅히 온조왕(溫祚王)이라 칭하여야 하며, 만일 그 이름을 바로 거명하는 것을 꺼린다면 백제 시조왕(百濟 始祖王)이라 칭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름의 한 글자만 따서 온왕(溫王)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사리(事理)에 있어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바로 고치도록 하소서.”하였다.

1754년 3월 6일 영조가 승지를 보내어 남한(南漢)에 있는 온조왕묘(溫祚王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1763년 5월 30일 영조가 광주 부윤 김응순(金應淳)에게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중수(重修)하라고 명하였다.1795년 9월 18일 정조가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묘호(廟號)를 숭렬전(崇烈殿)이라 하였다. 광주 판관(廣州 判官)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광주부(廣州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 사체상으로 외람스럽기만 합니다.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이나 평양(平壤)의 숭령전(崇靈殿)과 같은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으로 하여금 편액(扁額)의 이름을 정하게 한 뒤 광주부에서 써서 편액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역대 후왕(后王)을 제사지내는 곳에는 모두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新羅)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高麗)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 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전호(殿號)가 없다니 이는 흠이 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공사(公私) 간의 문적(文跡)에 이름을 가지고 임시로 일컫는 것은 외람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그런 줄 안 이상에는 즉시 바로잡아 고쳐야 마땅하니, 숭렬전이라는 칭호로 문헌비고(文獻備考)와 대전통편(大典通編)·오례의(五禮儀) 등 책을 즉시 세보 개정(洗補 改正)토록 하라. 그리고 마침 연석(筵席)에서 하교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숭렬전의 편액은 대신에게 명하여 쓰도록 하고, 편액을 거는 날에는 수신(守臣)을 보내어 제사지내 주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