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족
서씨는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
고조선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 주나라 성왕은 四夷(동이)에 선린융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강왕 때 주(周)의 정책이 강성(强性)을 띠므로 숙신은 주(周)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국(徐國)과 친선을 도모하여 동쪽(동이) 서언(徐偃)에게 왕을 호칭하게 하여 서언왕이라 하였다. 서언왕은 동이의 세력을 규합하고 주(周)에 대한 총력전을 실시하여 종주(장안과 낙양)까지 공략하여 주(周)의 세력을 쇠약하게 하고 주나라 소왕을 물에 빠져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주나라 목왕때 숙신은 서언왕을 회대 지역에서 이족(동이)의 대표로 하여 주(周)를 견제하고 주(周)에 대항하니 주나라 목왕은 동방의 동이 세력이 막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서언왕에게 백(伯)의 직위를 주어 주(周)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주나라 목왕은 초나라를 이용하여 서언왕을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견융을 정벌코자 하나 실패하고 제후국들 사이도 나빠졌다. BC.512년 서국(徐國)은 오나라에게 멸망하고 서자 후대에 서씨(徐氏)라 하여 명성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으로 산동 연주 동해에 거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