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조선2)
1628년(인조6)~1698년(숙종24)
자 숙옥(叔玉). 후에 이름을 숙(璹)으로 바꾸고, 자를 수옥(壽玉)으로 바꿈. 호 기암(寄菴). 선교랑(宣敎郞) 서후득(徐後得)의 아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할 뿐만 아니라,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어린 시절에 이미 문예(文藝)가 칭술되었다고 함.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공이 지은 「하득신동부(賀得神童賦)」를 고시(考試)하였는데, “이 글을 지은 자도 또한 신동(神童)이로다.”라고 하였음. 또 공의 나이 17세 때에 「누관책(樓觀策)」을 지어 한성별시(漢城別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고관(考官)이 같은 고을 출신의 어린 응시자라고 의심하여 공을 3위로 하였다고 함. 그 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와 경시(京試)에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는 불리(不利)하였음.
공은 이로부터 과거의 성패를 운명으로 돌리고, 문을 닫아걸고 단정히 앉아 성리학(性理學)에 잠심하였음. 공은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봉양하였고,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예(禮)와 슬픔을 지극히 하였음. 또한 공이 서울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 있던 친구가 벼슬하지 못하던 공의 형편을 애석하게 여겨, 인사 부서에 공을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도록 하였으나, 공은 고향에 어머니가 계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만류하고 내려왔음.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정직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이나 일의 시비를 함부로 말하지 않았음. 공은 만년에 아름다운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바위가 둘러쳐진 으늑한 곳으로 옮겨 살고, 당(堂)을 “야일당(野逸堂)”, 대(臺)를 “관란대(觀瀾臺)”라고 명명하여, 노닐면서 시를 읊는 곳으로 삼았음. 또 ‘생(生)은 기(寄)이다.[生寄也]’라는 말에서 뜻을 취하여 기암(寄菴)이라는 호를 지음.
공은 평소 생업을 돌보는 데에 힘쓰지 않았으나, 소수서원 등 유궁(儒宮)을 경영하는 데에는 온 정성을 쏟아서, 기울어지고 무너진 건물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서원의 규모가 잡히도록 하였음. 이에 안홍정(安弘靖)이 시를 짓기를 “신재옹께서 품은 천년 장수(藏修)의 뜻을, 영남의 높은 선비가 어기지 않고 전하였네.[愼翁千載藏修意, 高士南州不負傳]”라고 하였음.
공의 아들인 서성구(徐聖耈)가 「先考處士府君遺狀」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