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선광
扶餘善光 (?~6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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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백제의 왕족으로 의자왕의 아들. 혹은 부여풍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구당서》에 기록된 부여용(扶餘勇)과는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생애
《속일본기》에 따르면 631년 부여풍이 질자로 보내질 때 함께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여풍이 귀실복신 등의 추대로 백제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부여선광은 그대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부여풍과 함께 백제로 간 부여충승 · 부여충지 형제는 백촌강 전투 패배 후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다만 백제 부흥 운동에 아예 참여를 안한 것은 아니고, 유인원이 664년 10월 당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 의하면 부여풍과 함께 각각 고구려와 일본에서 위험인물로 간주된 듯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4년 3월 천황의 배려로 나니와(현 오사카) 지역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앞서 663년 백강 전투 패배로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한 직후이므로 더 이상 돌아갈 백제가 없으니 이 때부터 사실상 일본에 영구 정착하도록 배려한 듯 하다.
676년 일본 조정에 진귀한 물품을 바쳤으며, 686년 덴무 천황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후 지토 천황으로부터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를 하사받았다. '코니키시'는 바로 건길지로, 일본어가 아니고 백제어를 음차한 것이다. 따라서 쿠다라노코니키시씨는 '백제건길지'씨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 된다. 일본이 지원하고 백제인이 세운 백제왕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고구려로 망명했으므로[* 부여풍은 668년 고구려 멸망 후 결국 당나라에 잡혀서 중국 내륙으로 유배된다.] 일본 쪽에서는 일본에 남은 왕족 부여선광을 백제 구왕실의 후계자로 간주한 듯 하다. 생전 관직은 종3위 정광사에 이르렀다. 693년에 사망하고 사후 정3위 관위와 조위품이 내려졌다. 다만, 691년 '여선광(餘禪廣)'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쿠다라노코니키시씨 하사는 죽기 얼마 전에 이뤄진 걸로 보이며, 그 이전까진 부여씨를 계속 사용했던 듯하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 하사 전에도 백제왕 선광으로도 기록되어 있거나 아예 선광왕(善光王)이라 불린 걸 볼 때 도일한 백제 유민들의 대표로 내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손
아들 창성(昌成), 손자 낭우(郎虞), 증손자 경복(敬福) 등 여러 후손들이 기록에 남아있다. 창성의 경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도일했으나, 675년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었다. 반면 손자 양우는 737년까지 살았고, 증손자 경복도 69세로(698~766) 상당히 장수했다. 이후 경복의 자손들은 천황가와 혼인하면서 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경복의 현손녀 경명(慶命)은 사가 덴노와 혼인하여 815년 아들 미나모토노 사다무(源定)를 낳았고, 그의 증손녀 치카코(源周子)가 다이고 덴노와 혼인하여 914년 아들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를 낳았으며, 그의 딸 아키코(源明子)의 외손자 아키후사(源顕房)가 현 천황의 직계 조상인 호리카와 덴노의 외조부이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가 거처했던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는 그의 신주를 모신 쿠다라노코니키시신사(百濟王神社)가 창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