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윤
1740년(영조16)~1777년(정조1).
자 치승(穉承). 호 연사(烟沙). 창걸(昌傑)의 아들. 생부는 창현(昌鉉). 죽은(竹隱) 정구(鼎耉)의 증손.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서, 이미 압운(押韻)하여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함. 영조(英祖) 말년에 ������소학(小學)������을 중시하여 수령에게 명하여 친히 지방의 자제들을 권과(勸課)하도록 하였는데, 공은 늘 강석(講席)에 올라, 구두(句讀)와 문의(文義)를 모두 분명하게 하니, 강관(講官)이 칭탄해마지 않았다고 함.
10여 세에 ������주역총목(周易總目)������을 보고, 오산(梧山) 창재(昌載)에게 뜻을 가르쳐달라고 하였으나, 오산이 “네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하며 청을 물리치자, 공은 며칠 동안 부지런히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는데, 오산이 가르쳐 준 이외의 부분까지도 능히 스스로 이해하니, 오산이 크게 놀랐다고 함.
구사재(九思齋) 김낙행(金樂行)이 공의 과거 답안 1편을 보고 이르기를 “이러한 아이는 매우 기력(氣力)이 있으니, 다만 과유(科儒 : 과거 합격에만 몰두하는 유생)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고 함. 공은 주자서(朱子書)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일찍이 한두 번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문하에 나아가 질의한 바가 있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창재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음.
공은 부형들과 함께 돈암공(遯菴公)의 행적을 드러내는 사업에 매진하고, 후에는 자제들의 재주에 따라서 그들을 부지런히 계몽하여 주었음.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점(曾點)의 뜻을 취하여 산수 그윽한 곳에 나아가 세상일을 잊고자 하는 마음을 피력하기도 하였음. 후에 창재와 더불어 서사(書舍)를 경영하여 동몽(童蒙)들을 훈육하는 곳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함.
정와(貞窩) 황룡한(黃龍漢)이 「亡友徐君行錄」을 찬하고,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이 「烟沙處士徐公墓誌銘」을 찬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