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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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인천항 객주로서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 설립을 주도하고 후일 인천감리(仁川監理)까지 지냈던 유명한 상인 서상집(徐相(57) 축구심판 서병의潗)의 장자(長子)로 영국에서 정통 축구 지식을 습득한 권위 있는(?) 축구 심판 서병의(徐丙義 1893~1945)에 대해서는 인천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고 최성연(崔聖淵) 선생의 『개항과 양관 역정』에 그에 대해 고작 몇 줄 나와 있는 것이 전부다.


“축구를 하러 웃터골로 나올 적이면 일반 청년들은 겨우 미투리에 감발을 하였건마는 그들 형제는 가죽 축구화도 부족해서, 정강이까지 가죽 용구로 감싸고 나오는 통에 모두 기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호화롭게 살던 귀공자들이었고, 또 외국 유학을 갔다 온 재사들이었으나, 인천에서는 그들을 받아줄 만한 직장이 없었던 탓인지 서병의 씨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해며 천진서 살았다는데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혐의를 받고 우리 독립군의 손에 일가 몰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상이 최성연 선생의 글 내용의 일부다. 좀 더 앞부분에 서병의가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왔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것이 동아일보에는 옥스퍼드로 되어 있는 점, 그리고 친일 혐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서 그런 끔찍한 죽음을 맞았는지 밝히지 않은 궁금증 외에는 내용이 대체로 사실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1930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자.


“서병의 씨는 <중략> 어려부터 해외에 유학하였으니 1899년에 중국 상해 서양인 소학교 ‘토마스 한버러’를 졸업하고 1903년에 영국 ‘앨리브리 칼리지’를 마치고 1908년에 영국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대학’ 의과에 입학하였다가 옥스퍼드 대학으로 전학하여 1910년에 동 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1913년에 고향인 인천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18살 되던 해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는 것과, 어느 기록에는 그의 학력이 ‘한문 수학, 관립영어학교’ 졸업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소 미심쩍다. 그렇더라도 아버지 서상집이 상해에서 석탄무역을 했었던 기록으로 보아 상해를 거쳐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것만은 여러 정황으로 신빙성이 있다.


더불어 그는 영국 유학 당시 “축구 기술을 단련하여 귀국 즉시로 인천에 배운 바 기술을 코치하며 체육회를 발기하여 가지고 약 3년간 인천체육계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경성으로 올라와 기술이며 규칙 및 심판에 대한 소책자를 저술한 일도 있으며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자 제1회부터 축구 심판에 가장 권위를 발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 기사의 후반으로, 최성연 선생이 언급한 서병의의 웃터골 축구 이야기와 얼추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기사대로 그는 서울로 올라가 조선체육회 이사로, 축구 심판으로 맹활약한다. 축구 심판은 곧 서병의라 할 정도로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열린 주요 국내외 축구 경기의 주심을 혼자 도맡다시피 한다. 그러다가 1935년 9월 26일 대학 경기인 연전(延專) 대 숭전(崇專) 축구시합 주심을 끝으로 더 이상 신문지상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이, 이 무렵에 그가 상해나 천진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문득 1946년 10월 13일 석간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중국 천진에서 사망한 서병의의 1주기(10월 15일) 추모미사 기사가 실리는 것이다.


초창기 한국 축구 기술 발전과 심판 자질 향상에 공헌한 인천 외리 출신 서병의의 축구 인생 전모와, 가족 몰살까지 가져온 친일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도 인천 향토사 연구자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