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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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백제의 왕족. 31대 의자왕의 증손자로, 부여융의 손자. 부여융의 아들로는 부여문사[* 다만 부여효의 아들로 보는 설도 존재한다.], 부여문선,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 부여덕장(扶餘德璋)이 확인되지만 세 사람 외에도 아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단, 부여융 사후 부여융의 아들들인 부여문선, 부여덕장이 살아있었음에도 그들을 제치고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이 대방군왕에 임명된 점으로 보아[* 부여문선은 《신당서》 <돌궐전>에 따르면 698년 총관에 임명된 기록이 남아있고,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부여덕장은 자신의 딸인 부여태비를 690년에 낳았다.], 부여융의 적장자인 부여문사의 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행적

677년 당은 백제 웅진성에 있던 웅진도독부요동에 있는 구 고구려 지역의 건안성으로 옮기면서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 유민들도 함께 이주시키고,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 帶方郡王)'으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백제 전역을 이미 671년 전후로 신라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682년 부여융이 사망한 후, 측천무후가 부여경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동국통감》 권9 <신라기>에 따르면 686년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이 '조선군왕(朝鮮郡王)'을 제수받은 시기와 같다.

구당서》<현종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725년 내신으로 번국의 '고(구)려조선군왕'과 함께 '백제대방군왕'이 언급된다. 이 '백제대방군왕'이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기타

677년 건안성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서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2009년 이도학 교수는 발해가 8세기 중반 ~ 9세기 초반에 요동 반도에 진출했을 때 발해에 흡수되어 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건안성으로 옮겨진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로부터 자립해서 소백제를 형성했을 가능성은 적다. 《구당서》 <현종본기> 725년 기사에서 신라, 말갈[* 아마도 발해 또는 말갈 부족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조회하러 온 국가로 기술한 반면 '고려조선군왕', '백제대방군왕'은 당나라의 내신으로 외국으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고구려설이 아직은 학설 수준에 머무는 것처럼 건안성의 백제 유민들이 '소백제'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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