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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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
-1967년(박정의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의 가옥(민주화운동의 중심지)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준공 -안국동 윤보선 가옥에서 이를 대응하기 위해 건물 쪽으로 높은 나무를 심자 건물을 더 위로 증축함. -현재 명문당 출판사 건물로 사용 중.
아산 신항리와 해평윤씨[1]
구전에 의하면 윤취동(1798~1863)이 처음 신항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윤승구 가옥 안채 대청 종도리에 "승정 후 4갑진 11월 1일"의 상량 기록 1844년(헌종 10년)에 따르면 윤승구 가옥은 윤취동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
윤취동 : 윤승구 가옥 조성 -> 윤웅렬 -> 윤치호(1): 별장/신항감리교회 -> 윤영열 : 윤일선 가옥 조성 -> 윤치오(1): 근대 병리학 -> 윤치소(2): 윤보선가옥 조성(1903-1907)-> 윤보선 -> 윤상구
- 윤웅렬(1840~1911)
- 윤취동의 장남, 무관출신
- 1880년 별군관으로 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 이후 개화파 인물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대한제국기 중앙 고관직
- 개화기 해평윤씨 가문의 변화와 성장 계기 마련
- 장남 윤치호를 신사유람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파견
- 신항리교회 삼거리 비석 : 둔포 시장 잡세를 감면해준 공을 기려 상인과 객주가 건립.
- 기독교
- 윤치호
- 윤웅렬의 서자였으나 이후 본부인 전의이씨가 죽자 바로 첩이었던 전주이씨 이정무를 정실 부인으로 올려주고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인정
- 1910 현재의 신항교회 자리에 별장을 짓고 지인과 교류. -> 윤치호박사 기념예배당
- 윤상구/윤제형 가옥 : 천석군 : 윤보선 기념사업회와 그닥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내용. : 먼 친척.. ? 천석꾼이란 이미지를 활용?
윤보선 자서전
나는 구한말 광무 1년, 즉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향이며 개화당을 이끌었던 김옥균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고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조부(윤영열)로부터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집에 한문선생을 별도로 두고 학문을 익혔으며 어떤 때는 조부께서 직접 곁에 불러 앉히고는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조부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이 충(忠)과 효(孝)의 도(道)였다. 나라 없는 백성은 있을 수가 없으며 어버이가 안 계신 자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충효사상을 깊이 심어 주셨다. 삼국지(三國志) 얘기도 열심히 들려주셨다.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지략에 의한 전공치적에 아울러 충의에 깊은 뜻을 담아주시기도 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나는 은연중에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을 흠모하게 되었고 막연하나마 장차 커서는 유비와 관운장처럼 정치가나 개국공신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조부(윤영렬)께서는 '술을 입에 대지 말라.'라고 훈계하셨다. 그 이유는 4대조인 고조(윤취동)께서 약주가 과하시어 가세를 기울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젊은 시절 홀로 객지를 떠돌아다닐 때는 물론이요 정계에 투신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평생을 술과는 인연을 멀리하여 철저한 절주 생활을 했다. 조부의 가르치심이 나를 술과 멀리하도록 했고 나는 조부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또하나 기억나는 일은 내가 여러 날 점심을 먹지 않은 일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일곱 살이나 여덟 살때의 일로 기억된다. 어느 날 안채에 들어가니 집안 어른들께서 서울에서 내려온 신문을 보시며 매우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국채(國債)를 값아야 하는데 국가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헌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주, 금연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 얘기를 듣고 나도 헌금운동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점심을 거르고 그 남은 식량 대신 부모님께 돈을 타내서 헌금으로 낼 작성이었다. 나는 여러 날 점심을 먹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얼마만큼의 돈을 만들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돈은 줄테니 제발 밥은 먹어라.' 하시며 타이르시던 조모님과 자친의 근심스러워 하시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여기에서 조부와 선친이 어떤 분이셨는가를 상세히 밝히는 것이 우리 집안의 내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기술해 본다. 조부께서는 지혜로우시고 담력이 강하셨다. 말하지면 문과 무를 겸비하신 지장이셨다. 자손들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키셨는데 특히 역사이야기를 통해 심성교육에 주력하셨다. 거기에서 살아가는 슬기와 인간의 기본됨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조선조 말기시대로 정치는 부패해 있었고 민심은 뒤숭숭해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관리들은 부정을 일삼고 도처에 도적들이 들끓어 마음 놓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민심 흉흉했다. 조부께서는 성격상 관직을 싫어하셔서 칩거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유길준, 박영효 등이 조부를 평안북도 강계부사로 천거했다. 조부께서 그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개화파인 그들이 조부의 능력을 매우높이 평가했던 것 같았다. 강계는 만주와 국경을 접하고 잇는 곳으로 마적(馬賊)의 침입이 잦아 늘 불안에 쫓기며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관리들이 부패해서 닥치는 대로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강계 주민들은 생활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 강계를 다스릴 책임자로 가기를 꺼리고 있었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관리들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난장판이 된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조부께서는 강계에 부사 겸 방어사로 부임하였다. 물산이 풍부한 대신 도적때가 들끓고 관리들은 닥치는 대로 거두어 들여 치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조부께서는 우선 관리들의 부정, 부패에 엄명을 내려 바로 잡으려 애쓰셨고 극도록 핍박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셨다. 그 결과 부임하신지 3개월여 만에 강계의 질서를 거의 정상으로 회복시켰다. 관리들의 부정을 근절시키고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치안상태를 바로잡았다. 마적들의 침입을 앞장서서 나가 막으시니 도적떼의 횡포도 훨씬 줄어들었다. 그...... 동학란이 일어나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때 유길준 박영효 등이 고종임금께 진언해서 조부를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로 임명토록 했다. 조부께서는 난세를 다스리기 위해 쾌히 안성으로 가셔서 군수 겸 삼남토포사의 잘에 앉으셨다. 이에 임금께서는 이례적으로 마패를 내리시어 어사를 겸하도록 하셨다. 나도 어릴 때 조부를 따라 안성 동헌에서 지냈는데 그때 기억이 간간이 떠오르곤 한다. 7년간 안성군수로 계셨던 조부께서는 많은 일을 하셨고 치안상태를 바로 잡는 데 큰 공을 세우신 걸로 기억된다. .... 조부께서는 조선조 선조임금때 영의정을 지내셨던 오음 윤두수 조상의 치적의 억울함을 늘 마음속에 두고 계셨다. 오음 할아버지는 나의 10댜조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영의정으로 명나라에 군대 요청하는 것을 반대혔다. 이것이 결국 반대파의 모략 중상의 빌미가 되어 함경도로 귀양을 가시게 되었다. 오음의 반대를 무릎쓰고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군과 싸우기보다는 우리 군대 1만여명을 살상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뒤늦게 잘못이었음을 조정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에 율곡 이이가 다시 오음을 등용시키자고 임금께 진언하여 영의정으로 재등용되어 선정을 했지만, 조부께서는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시고 참된 정치의 본뜻이 무엇인가를 늘 말씀하였다. .... 당시 충남 아산의 우리 집안은 300석을 하는 부농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300석이라면 대농집안이었다. 조부(윤영렬)께서는 큰 살림을 모두 나의 선친(윤치소)에게 맡기시어 관리하도록 하셨다. 선친은 형제를 비롯, 그들의 자손 등 윤씨 집안의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셨다. ... 벼슬을 싫어하셨던 선친(윤치소)께서는 잠시 중동학교의 교장을 하셨다가 민대식이란 분과 50만원씩 공동추자하여 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셨다. 구후 50만원을 자본금으로 경성직뉴회사를 설립하셨는데 나중에 인촌 '''김성수'''씨가 맡아서 운영한 경성방직의 전신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직물회사였다. 현재 서울 종로에 있는 천도교회관 자리 전체가 그 당시 우리 집안의 집이었는데 선친께서는 그 곳에 가나다 상점이란 대규모 잡화상을 운영하시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서울 장안에 유통시키는 일을 하시기도 했다. 또한 광주분원자기라는 도자기 전문제작회사를 차리고 각종 도자기 공급에도 큰 몫을 하셨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영리를 추구한다거나 아닌 말로 장삿속으로 회사를 운영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정을 몰랐던 수수한 기업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않았던 것은 조부의 영향이 컸음은 물론이었고 우리 집안의 가훈과도 같은 '청렴결백과 정직'을 성실하게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덟 살 때 우리 집안은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온 나는 집근처에 있던 교동 보톧학게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윤취동
- ↑ 강인구, 아산 신항리 큰새말(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마을) 건축특성 조사연구, 목원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건축계획전공
- ↑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해위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