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소
윤치소
윤치소(尹致昭) 일제강점기 기독교인이자 관료로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동야(東野)이고, 창씨한 이름은 이동치소(伊東致昭)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둔포면(屯浦面)이다. 조부는 윤취동(尹取東)이고, 부친 연구(蓮龜) 윤영렬(尹英烈)과 모친 청주한씨 (淸州韓氏) 한진숙(韓鎭淑)과의 사이에서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윤치오 (尹致旿)이고, 동생으로 윤치성(尹致晟)‧윤치병(尹致昞)‧윤치명(尹致明)‧윤치영(尹致 暎)이 있다. 정치인으로 유명했던 사촌 형 윤치호(尹致昊)와 한민국 제1 내무 부 장관이었던 사촌 동생 윤치영(尹致暎)과 함께 가문을 표하는 인물이었다. 1898년에는 윤치호와 함께《경성신문(京城新聞)》을 창간하였으며, 한제국말기 에는 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감사직을 지냈으며, 1911년부터는 농사개량을 주 도하던 농담회(農談會)에도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광산업과 주식회사 경성직뉴 (京城織紐)의 사업가로, 1915년에는 경성협찬회(京城協贊會) 정회원으로서 조선통 치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지원하였다. 1920년에는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의 이사직을 지냈고, 일본 정부의 교육자문기 구인 경성학교비평의회의 평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중추원 참의로서 연수당 600원을 받았으며, 퇴임할 때 정7위에 서위되었다. 1917년부터 사망 때까지 서울 안동교회장로였는데, 기독교장로회로서 1941년 전 시체제로 들어간 일본 정부에 비행기 헌납을 주도하는 역할과 임전보국단(臨戰報國 團) 발기인 등으로 활약하면서 일본 정부에 협조하였다. 1940년에는 해평윤씨 문중 표로서 ‘이토[伊東]’로 창씨 할 것을 의결하였다.[1]
사회적 위치
- 조선말의 문인이자 정치가
- 금융인, 기업가, 사업가
해평윤씨 가문 내 위치
-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
- 1대 내무부 장관 윤치영의 형
- 개화기 정치인 윤치호의 사촌동생
- 역사학자 이병도와 겹사돈
- 흥선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한 윤원선의 아버지
- 윤치오의 동생
-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윤치영의 형
-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인 윤두수와 윤근수의 후손
- 윤영렬의 아들
- 윤취동의 손자
가문 외 관계
- 대한제국 시절 중추원 의관 이봉하의 사위.
- 의친왕 이강, 이종훈, 권동진과 필운학당에서 수학.
- 조중양과 의병활동
- 이상재, 유진태와 조선교육회를 설립
- 이상재, 한규설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참여
활동
- 경성신문 설립
- 경성방직회사 설립
- 광장주식회사 감사
- 을사보호조약
- 태극학회 모금활동
- 대한천일은행 감사
- 광업주식회사 설립
-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
- 조선광업주식회사 경영
- 안동교회 예배당 설립 기여
- 청년지식교환회 결성
- 가나다 상점 개업
- 조선상업은행 감사
- 동양서원, 동양서원출판사 경영
- 혁신점 경영
- 분원자기주식회사 감사
- 주식회사 광업의 중역
- 혁신상점 인수, 운영
- 경성고등학교야구제회 이사
- 경성부 학교평의회 위원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애국경기도호 군용기헌납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출
-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에 선출
출처
- ↑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