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득경 초상
심득경 초상 | |
한자명칭 | 沈得經肖像 |
---|---|
작가 | 윤두서 |
제작시기 | 1710년 |
소장처 | 국립광주박물관 |
문화재지정사항 | 보물 제1488호 |
유형 | 초상 |
크기(세로×가로) | 160.3x87.7cm |
목차
정의
조선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심득경(沈得經)을 그린 초상화이다.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매일 함께 어울리며 학문을 강마하던 친구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이 1710년 8월 21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11월 그를 추념(追念)하여 이 초상을 그렸다. [1]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초상은 동파관에 유복 차림을 하고 있다. 화면 상단에 “정재처사심공진(定齋處士沈公眞)”이라고 예서로 쓰여 있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는 이서(李潊, 1662-?)가 지은 찬을 [[윤두서]가 썼으며, 왼쪽 상단에 다시 이서의 찬이 적혀 있다. 그리고 우측 아래쪽에 “維 王三十六年庚寅十一月寫時 公歿後第四月也海南尹斗緖謹齋心寫”라고 쓰여 있어 윤두서가 숙종36년인 1710년 11월에 추화(追畵)한 것임을 알 수 있다.[2] 평소 심득경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윤두서와 이서가 그를 추모하여 함께 제작한 초상화이다.[3]
보물 제1488호로 지정되었다.
초상에 묘사된 모습
심득경은 동파관(東坡冠)에 도포 차림을 하였다. 손을 앞에 모으고 얼굴을 7분면 정도 오른쪽으로 틀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심득경의 인상은 인자하고 내성적이다. 눈은 맑고 코는 단정하며 입술은 붉고 눈썹은 가지런하다. 피부는 깨끗하고 귀는 시원하며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은 성글고 수염은 깨끗하고 간결하다. 윤두서의 자화상만큼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도식적으로 그려진 부분에서 판화의 영향도 눈에 띈다. 이는 심득경이 사망한 후 기억에 의지해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득경이 지닌 맑고 깨끗한 처사로서의 정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4]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靑竹畵史)'에 이 초상에 대하여, "친구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리니 심득경 가족들이 이를 보고 모두 울었다."고 전한다. [5]
이서(李潊, 1662-?)가 쓴 초상 찬문에 이르기를, “그 상(像)은 단아하고 공근(恭勤)하며, 목소리는 맑고 모습은 근엄하며, 그 생생함이 완연하고 방불하여, 그 성정(性情)과 덕의 성실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윤두서의 필력을 통해, 선비로서 깔끔하고 단정한 심득경의 용모에서 더 나아가 그 내면적 정신세계의 표현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심득경 초상 | 초상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심득경 초상 | 심득경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심득경 초상 | 국립광주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심득경 초상 | 윤두서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심득경 | 윤두서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심득경 | 이서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10년 | 심득경 초상이 제작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5.188898 | 126.883076 | 심득경 초상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주석
- ↑ "심득경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득경 초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심득경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득경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득경 초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심득경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