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산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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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유격대(九月山遊擊隊) | |
대표명칭 | 구월산유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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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九月山遊擊隊 |
창립자 | 김종벽 |
창립시대 | 현대 |
창립일 | 1950년 12월 |
주요업무 | 반공 유격활동 |
관련단체 | 구월산유격군동지회 |
목차
정의
1950년 12월 김종벽 대위가 창설하여 6.25전쟁 당시 황해도 구월산을 거점으로 반공 유격활동을 벌인 부대이다.
내용
개요
구월산유격대는 김종벽 대위가 부대장을 맡아 1950년 12월 창설하였으며, 본래의 이름은 '연풍유격대'이다. 창설 당시 규모는 6백 명 정도였으나 1951년 초에는 2천5백 명으로 늘어났고, 휴전직후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8백 명 규모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1951년 3월 연풍부대가 구월부대로 개편된 뒤 서해지구, 초도, 석도, 웅도, 청양도, 상취라도, 하취라도, 피도, 능금도 등지에서 도서방위와 공격활동을 벌였다. 유격대는 북한 인민군과도 치열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1]
또한 수십명의 여성 대원들이 빨래를 너는 방법으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대원들의 생필품을 조달하면서 전투를 도왔다. 그 중에서도 무장대를 조직하여 89명을 구출하는 등 전공을 세워 육군 총참모장 표창을 받은 이정숙 대장의 활약이 알려져 있다.[2]
유격대의 거점이 된 구월산
구월산이 유격대의 거점이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 북한이 공산화하자 200여만 명이 남으로 피란했으나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장항쟁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항거가 거셌다. 인민군 징집을 거부하고 구월산에 모인 가톨릭 신자들은 전쟁 전날 밤 주임신부가 납치되자 격분하여 유격대에 합류하였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서봉-구월산지구 유격대 | 구월산유격대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구월산유격대 | 김종벽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구월산성 | 구월산 | A는 B에 위치한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월산유격대 | 구월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구월산유격대 | 1.4후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구월산유격대 | 이정숙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1.4후퇴 | 6.25전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김교만, "유격대’ 기록 첫공개", 『문화일보』, 1998년 10월 01일.
- ↑ 고두현, "구월산 유격대", 『한국경제』, 2013년 12월 2일.
- ↑ 고두현, "구월산 유격대", 『한국경제』, 2013년 12월 2일.
- ↑ 이상흔, "6.25전쟁 휴전 64주년...대북 유격대원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조선pub』, 2017년 7월 27일.
- ↑ 구자익, "옹진군, 한국전쟁 구월산유격대 전사자 추모", 『중부일보』, 2016년 8월 3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노도양, "구월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차용걸, "구월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교만, "유격대’ 기록 첫공개", 『문화일보』, 1998년 10월 01일.
- 고두현, "구월산 유격대", 『한국경제』, 2013년 12월 2일.
- 이상흔, "6.25전쟁 휴전 64주년...대북 유격대원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조선pub』, 2017년 7월 27일.
- 노도양, "구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