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학교
대성학교(大成學校) | |
대표명칭 | 대성학교 |
---|---|
한자표기 | 大成學校 |
유형 | 교육단체 |
창립자 | 안창호 |
창립시대 | 현대 |
창립일 | 1908년 9월 26일 |
해체일 | 1912년 |
목차
정의
안창호(安昌浩)가 1907년 평양에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이다.
내용
설립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고 국민교육의 사표(師表)가 될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은 독립사상 고취와 국민계몽을 주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였다. 대성학교는 평양의 김진후, 선천의 오치은, 철산의 오희원 등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하였다. 교장에 윤치호, 대변교장(代辨校長)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이 책임을 맡았으며, 신민회 인사 및 애국 지사 여러 명이 교사로 근무하였다.[1]
교육방침
대성학교의 교육 방침은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학교의 교육 방침은 (1) 건전한 인격의 함양 (2) 애국 정신이 투철한 민족 운동가의 양성 (3)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육성 (4) 건강한 체력의 단련 등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대성 학교는 자아 혁신과 자기 개조를 통하여 민족 혁신과 민족 개조를 이루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창호는 각 도에 1개씩의 분교를 두고 졸업자로 하여금 각 군⋅면의 초등학생을 지도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2]
대성학교는 중등학교 수준의 교육 과정 외에도 군인 출신인 정인목을 체육 교사로 초빙하여 '건강한 체력의 단련'이라는 교육 방침 아래 군사 교육도 실시하였다. 신민회가 독립군 양성 운동을 펼쳤던 것을 생각하면, 대성학교 출신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애국 독립지사로 양성하려고 했던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3]
폐교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해산과 함께 폐교를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1909년부터 일어났던 사립 학교들의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과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 등으로 인해 대성학교는 폐교 위기에 처했고, 결국 1912년 봄에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교 조치되었다.[4]
의의와 평가
대성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등과 함께 평안도지방의 교육 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민족 항일기 초기의 민족교육기관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대성학교 | 안창호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대성학교 | 신민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대성학교 | 윤치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대성학교 | 장응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대성학교 | 105인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08년 09월 | 안창호가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
1912년 | 대성학교는 일제에 의해 폐교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대성학교의 모습을 담은 옛 사진. [6]
영상
주석
- ↑ "대성학교",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손인수, "대성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대성학교",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대성학교",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손인수, "대성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대성학교",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