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사(高麗史) | |
대표명칭 | 고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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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高麗史 |
영문명칭 | Goryosa |
유형 | 역사서 |
저자 | 김종서,정인지 |
저술시기 | 1449년-1451년 |
간행시기 | 1613년 |
시대 | 조선 |
수량 | 139권 75책 |
판본 | 목판본 |
표기문자 | 한문 |
소장처 | 동아대학교 박물관 |
지정번호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 |
지정일 | 2010년 9월 20일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관찬사서이다.[1]
내용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2] 고려시대의 역사·문화 등을 기전체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조선건국 직후인 1392년 10월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다.[3] 『고려사』는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아울러 이전 왕조인 고려의 무신정권기∼우왕·창왕기까지의 폐정을 권계하고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4]
제작과정
태조
1392년(조선 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은 13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1414년(태종 14) 왕은 하륜(河崙) ·남재(南在) ·이숙번(李叔蕃) ·변계량(卞季良)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의 조선 건국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4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세종
세종은 즉위 후에 『고려국사』 수정작업을 거론하였다, 14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겨 1421년(세종 3) 정월에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부분이 바로잡혔다. 그러나 국제관계를 고려한 결과, 제칙(制勅) ·태자(太子) 등을 교(敎) ·세자(世子) 등으로 고치는 등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이 책 역시 반포되지 못하다가 1423년(세종 5)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였다. 1424년(세종 6) 8월에 일이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은 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1431년(세종 13)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 개정 작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442년(세종 24) 8월에 신개(申槩) ·권제(權踶)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완성하였다. 세종은 다시 1449년(세종 31)에 김종서 ·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오류를 바로 잡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14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에 소량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14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였다.[5]
최무선에 대한 기록
『고려사』에는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주요 인물 최무선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권133, 열전 권제46, 신우(禑王) 3년 10월 1377년 10월 미상(음):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다 10월 비로소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했는데,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최무선이 원(元) 염초 기술자인 같은 마을 사람 이원(李元)을 잘 대우하여 몰래 그 기술을 묻고, 가동 몇 명으로 하여금 익혀 시험해 본 후 마침내 왕에게 건의하여 설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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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문읽기", |
권134, 열전 권제47, 우왕(禑王) 6년 8월: 김사혁과 나세 등이 공주·진포 등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왜구가 공주(公州)를 침입하자, 김사혁(金斯革)이 공격하여 4급(級)을 베었다. 나세·심덕부·최무선 등이 진포에서 왜구와 싸워서 이기고 사로잡혔던 334인을 되찾았으며, 김사혁은 남은 왜구들을 임천(林川)에서 추격하여 사로잡았고 46급을 베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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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문읽기", |
권114, 열전 권제 27: 나세 ...심덕부·최무선 등과 함께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했는데, 이때 적선 5백 척이 진포 어구로 들어와 정박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일방 수비하는 한편 상륙해 각 고을로 흩어져 들어갔다. 적들이 약탈을 자행하니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곡식을 자기들 배로 옮기면서 흘린 쌀이 한 자나 되게 쌓였다. 나세등이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쏘아 적선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렸고, 배를 지키던 적 대다수는 불에 타 죽었으며, 바다로 뛰어들어 죽은 자도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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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문읽기",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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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 고려사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종서 | 고려사 편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정인지 | 고려사 편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려사 편찬 | 고려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고려사 | 동아대학교 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고려사 | 최무선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고려사 | 화통도감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고려사.[6]
영상
주석
- ↑ 신안식,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17일. - ↑ "고려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고려사",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안식,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17일. - ↑ "고려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신안식,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