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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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 |
대표명칭 | 조광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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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趙光祖 |
생몰년 | 1482-1519 |
본관 | 한양(漢陽) |
호 | 정암(靜菴) |
자 | 효직(孝直)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조원강(趙元綱) |
모 | 민의(閔誼)의 딸 여흥 민씨 |
정의
조광조(趙光祖)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1510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1] 이 해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계비 책봉문제와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 문제의 중심에서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 일이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2] 1519년 가을 정국공신(靖國功臣) 의 개정 문제를 주장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으로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광조와 그의 일파인 윤자임(尹自任), 이자(李耔),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등의 신진세력들이 축출되었다.[3]
학문과 정치 사상
성리학은 이미 고려 말에 전래되어 학자들에게 알려졌으나, 성리학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성종(成宗) 때 김종직의 문인들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한훤당 김굉필이 그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되는데, 조광조는 김굉필의 문인이었다.[4]
스승의 영향을로 조광조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5]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이 나오는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조광조는 다스림의 근본인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의 주체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