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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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慶州 崇福寺址 大崇福寺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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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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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 崇福寺址 大崇福寺碑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각자 | 환견(桓蠲) |
건립연대 | 8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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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숭복사지(崇福寺址)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내용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지(崇福寺址)에서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崇福寺碑)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1]
비문에 따르면 885년(헌강왕 11) 왕이 현재의 숭복사지에 있던 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崇福寺)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는데, 이후 헌강왕과 그 뒤를 이은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에 이르러서야 비문을 완성하였다고 전한다.[2]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3]\
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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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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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국립경주박물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동국대학교박물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경주 숭복사지 | A는 B에 있었다 | A edm:formerLocation B |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A ekc:writer B |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환견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A ekc:inscriber B |
주석
- ↑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 - ↑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 - ↑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