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설총(薛聰) | |
대표명칭 | 설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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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薛聰 |
생몰년 | ?-? |
자 | 총지(聰智) |
시대 | 신라시대 |
국적 | 신라 |
대표저서 | 화왕계(花王誡) |
대표직함 | 한림(翰林) |
부 | 원효(元曉) |
모 | 요석공주(瑤石公主) |
정의
신라 중대의 대학자.
내용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1] 6두품 신분으로 추정되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2]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1021년(현종 12)에 홍유후(弘儒候)로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고려사(高麗史)』에는 1022년(현종 13)에 추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개 『고려사』의 기록이 옳다고 본다. 한때 설총이 이두(吏讀)를 창시했다고 알려졌으나, 설총 이전의 금석문(金石文)에서도 이미 이두를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 창시가 아니라 집대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설총은 한당유학(漢唐儒學)을 중심으로 훈고학(訓古學)적 학풍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3]
화왕계(花王戒)
설총이 지은 설화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따르면, 설총의 유일한 유문(遺文)으로서, 화왕(花王)이 아첨하는 미인(美人) 장미(薔薇)와 충간(忠諫)하기 위하여 베옷에 가죽띠를 두른 포의위대(布衣韋帶) 차림으로 찾아온 백두옹(白頭翁, 할미꽃) 두 사람을 두고 누구를 택할까 망설이는 것을 보고 백두옹이 화왕에게 간언(諫言)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들어 설총이 [신라 신문왕|신문왕]]을 깨우쳤다고 한다.[4]
화왕계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설총이 지은 글은 벌써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이리라 여겨진다.[5]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원효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요석공주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화왕계 | 설총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주석
- ↑ 박노춘, "설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설총",
『두산백과』online . - ↑ "설총",
『두산백과』online . - ↑ "화왕계",
『두산백과』online . - ↑ 고운기, "설총, 『인물한국사』, 2010. 온라인 참조: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고운기, "설총, 『인물한국사』, 2010. 온라인 참조: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