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
원삼(圓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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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원삼(圓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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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단삼(團衫)[1], 대수(大袖)[2], 대의(大衣)[3], 장오자(長襖子)[4] |
착용신분 | 왕실, 궁중, 서민 |
착용성별 | 여성 |
정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 예복의 하나.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 왕실의 황후, 황태자비,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 내외명부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착용범위가 넓고 조선시대 말에는 혼례복으로도 많이 입혀짐.
- 조선 말기에 원삼은 비(妃), 빈(嬪)과 내외명부(內外命婦) 및 황후까지 착용- 황후는 황원삼(黃圓衫), 왕비는 홍원삼(紅圓衫), 공주와 반가 여인들은 녹원삼(綠圓衫)으로 신분에 따라 색을 구별.
기본 정보
유래
여성이 착용한 단령(團領)에서 맞깃형태로 변천.
기본 형태
- 깃이 서로 마주하는 대금형(對衿形)의 맞깃 혹은 배자깃으로 불리는 깃이 달려있어 앞자락이 겹치지 않음.
- 길이는 뒷길이 앞길보다 긴 전단후장(前短後長)이 대부분이며, 바닥까지 이르는 긴 포의 형태.
- 겨드랑이 아래로 길게 트임이 있고 섶과 무가 없음.
- 두리소매 형태의 넓은 소매가 달렸고, 소매 끝에는 색동과 백색의 한삼(汗衫)을 연결.
- 여밈 방식은 고름이나 매듭단추가 달렸고, 길이가 매우 긴 별도의 대(帶)를 둘러 착용.
시대별 형태
① 15~16세기 단령형 원삼(여성 단령)[5]
- 품이 대체로 넉넉하거나 크게 제작해 남성 단령은 품이 대부분 50~70cm인 반면 이 시기의 원삼은 여자의 옷임에도 불구하고 80~102cm까지 품이 매우 넓은 유물 존재.
- 소매모양이 직배래의 통수 형태로 한삼이 달렸거나 달았던 흔적이 발견되어 한삼을 달기 위한 의도로 보여 예복의 용도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남성 단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
- 이시기 출토 유물의 절반 가량 흉배가 부착
- 대대(大帶)가 함께 출토, 도련에 선단이 둘러져 있음.
② 17세기 초중반의 원삼[6]
- 변화가 심한 시기로 특별히 17세기 전반기에는 단령형 원삼(여성 단령)이 전형적인 원삼으로 변하는 과정: 단령과 원삼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형태가 나타남.
- 도련의 모양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뀜.
- 소매모양에 변화가 생기며 소매 끝에 색동이 처음 등장.
- 앞길에만 무가 있으며 뒷길은 무가 없이 안단을 둘러 원삼의 도련과 같은 형태로의 전환이 시작.
- 홑옷.
- 깃이 교임의 단령 깃에서 점점 둥근 깃의 대금형 깃으로의 변화가 시작.
- 원삼의 대와 유사한 대가 출토되었고, 흉배가 부착된 형태가 감소.
③ 17세기 후반~19세기 초반의 원삼.[7]
- 깃 모양이 대금형의 원삼 깃으로 변화.
- 예외가 있지만 두리소매가 등장하며 두 줄 색동과 한삼이 달린 형태로 변해가는 추세.
- 도련선이 당의의 곡선과 같은 형태로 변화.
- 전단후장(前短後長, 앞이 짧고 뒤가 긴 형태)의 강화.
- 겹으로 만든 원삼이 등장.
④ 19~20세기 원삼[8]
- 조선 후기로 가면서 원삼은 궁중 여성 및 사대부 부인의 예복이자 서민들의 혼례복으로 형태적인 이분화를 이루며 착용.
- 『가례도감의궤』에 의하면 왕비용 원삼은 없고 왕세자빈과 왕세손비의 녹색 원삼이 있으며, 실제로 왕자비나 공주‧외명부와 같은 높은 신분에서는 녹색 원삼을 예복으로 입음.
-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왕비를 황후로 격상시켜 부르며 황색 원삼을 입도록 하고 황태자비는 홍색 원삼을 그 이하의 신분에서는 녹색 원삼을 입도록 함.
- 민가의 혼례용 원삼은 왕실 복식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직금과 금박으로 장식한 궁중원삼과 달리 민가에서는 금장식이 배제되고 대신 소매에 색동의 수가 많아지며 직선미가 돋보이는 단순한 형태.
- 궁중원삼은 앞이 짧고 뒤가 긴 형태로 길이가 매우 긴 특징을 보이며, 민가의 원삼은 길이가 짧은 편.
- 궁중원삼은 소매가 매우 넓고 길며 두 줄의 색동과 한삼이 달리는 반면 민가의 원삼은 색동의 수가 정해진 양식이 없이 많이 부착.
- 원삼의 옆선과 도련의 형태가 점차 직선형으로 변화.
- 겹원삼이 정착, 흑색 원삼만 홑.
- 민가 원삼의 특징으로 길과는 다른 색의 깃과 고름을 달음.
동궁비 홍원삼(앞면). 중요민속문화재 제48호(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8,00480000,11)
동궁비 홍원삼(뒷면). 중요민속문화재 제48호(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8,00480000,11).
전 황후 황원삼(앞면). 중요민속문화재 제49호(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8,00490000,11).
전 황후 황원삼(뒷면). 중요민속문화재 제49호(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8,00490000,11).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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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눌재집|눌재집(訥齋集)
- 미암집|미암집(眉巖集)
- 사례편람|사례편람(四禮便覽)
- 상변통고|상변통고(常變通攷)
- 朴東媛(1976) 圓衫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 송미경(2002) 조선시대 여성 단령(團領)에 관한 연구-출토복식을 중심으로-. 한국복식학회, 服飾, 52(8).
- 李眞英, 金仁淑(1992) 韓國 圓衫의 由來 糾明을 위한 形態的 考察. 한국복식학회, 服飾 vol.18
- 이태옥, 김혜영, 조우현(2005) 안동김씨묘 출토 조선후기 원삼의 특징. 한국의상디자인학회, 한국의상디자인학회지 Vol.7 No.2
- 任賢珠(2011)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박사학위 논문, 경원대학교.
- 전정희, 박현정(1999) 靑色 圓衫에 관한 연구. 한복문화학회, 한복문화 제2권
- 周錫保(1991) 中國古代服飾史. 中國戲劇出版社, 北京, 中國.
주석
- ↑ 조선 초기 명나라로부터 사여된 관복 중 왕비의 상복으로 15세기 중반(1450년)부터 17세기 초반(1617년)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며, 1617년을 마지막으로 단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연대 차이는 있지만 통수에 스란 장식을 한 15세기 단삼과 17세기 원삼이 조형성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任賢珠(2011)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박사학위 논문, 경원대학교. pp. 32~34.).
- ↑ 이재의 『사례편람(四禮便覽)』.
- ↑ 이재의 『사례편람』.
원삼은 즉 대의(大衣)이다. 색이 있는 견(絹)이나 혹은 주(紬)를 써서 만드는데 아래 제례삭참조에 보인다.(李縡, 『四禮便覽』 卷3, 「喪禮, 襲」, “卽大衣, 用色絹或紬爲之, 制見下祭禮朔參條.”) 출처: - ↑ 유득공의 『상변통고(常變通攷)』.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여자의 상에는 원삼이나 몽두의(蒙頭衣) 혹은 장오자(長襖子), 치마, 채색 신을 사용한다.(柳長源, 『常變通攷』 卷7, 「喪禮」, “ 『備要』女喪圓衫, 或蒙頭衣, 或長襖子, 裳, 彩鞋.”) 출처: - ↑ 任賢珠(2011)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박사학위 논문, 경원대학교. pp. 51~85.
- ↑ 任賢珠(2011)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박사학위 논문, 경원대학교. pp. 85~99.
- ↑ 任賢珠(2011)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박사학위 논문, 경원대학교. pp. 99~120.
- ↑ 任賢珠(2011) 朝鮮時代 圓衫의 由來와 變遷過程 硏究. 박사학위 논문, 경원대학교. pp. 12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