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
작가 | 정창섭 |
---|---|
제작연도 | 1976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전쟁기념관 |
설명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왜군과 싸워 장렬히 순국한 조헌(趙憲)과 승장 영규(靈圭)의 전투장면을 그린 기록화로,[1] 2차 금산전투의 장면을 담고 있다.
조헌과 영규는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과 800명의 승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금산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화살이 다하고 날도 저물어 적군이 보이지 않게 되자 조헌 휘하의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적군의 공세는 한층 더 심해졌다고 한다. 실제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으로, 작품 배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러나 조헌은 태연히 싸움을 지휘하더니 마침내 사태가 기울자 말안장을 풀어버리며,
장부가 국난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랄 것인가. 이 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2]
하고 끝까지 싸움을 지휘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으니 그 휘하의 군사들도 한 사람 물러서지 않고 모두 그와 함께 전사하였다고 한다.
작품 중앙에는 두 명의 장수가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에서 검을 높게 쳐들고 왜군의 검을 맨손으로 막아내고 있는 인물이 조헌으로, 그의 오른편에 안장이 풀린 갈색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조헌의 왼편에서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왜군을 공격하고 있는 장군은 영규로, 영규의 승병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민족기록화들이 부족한 묘사력과 산만하고 평면적인 화면구성으로 인해 군상의 효과를 제대로 창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삼각형 구도와 역광이나 반사광의 효과를 통해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의 중앙으로 이끌어 집약된 '힘'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3]
시각적 안내
- 그림위에 마우스를 올려 보세요.
관련 민족기록화
조선시대 전쟁 소재 작품
그래프
관련항목
노드 | 관계 | 노드 |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에 의해 그려지다 | 정창섭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에 소장되어 있다 | 전쟁기념관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을 배경으로 한다 | 금산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을 소재로 삼다 | 조헌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을 소재로 삼다 | 영규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을 소재로 삼다 | 금산전투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제작연도 | 1976년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감사원 대여기간 | 1991.10.20 ~ 1992.10.19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전쟁기념관 이전 연도 | 1998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소장처 | 감사원 | 37.587238 | 126.984968 |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 소장처 | 전쟁기념관 | 37.5369559 | 126.9749353 |
참고문헌
주석
- ↑ "기록화 : 조헌의 금산전투",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온라인 서비스 (2017년 2월 4일 확인)
- ↑ 편집부, 「민족기록화로 본 한국역사」, 월간보훈문화, 2004년, 93쪽.
-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