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홍대용(洪大容) | |
대표명칭 | 홍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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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洪大容 |
생몰년 | 1731년-1783년 |
본관 | 남양(南陽) |
호 | 홍지(弘之) |
자 | 덕보(德保)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사헌부감찰 / 세손익위사시직, 선공감감역, 사헌부감찰, 태인현감, 영천군수 |
부 | 홍역(洪櫟) |
모 | 홍역 처 청풍 김씨 |
성격 | 실학자, 과학사상가 |
유형 | 인물 |
정의
1731(영조 7)∼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개요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1]
북경 방문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2]
사상적 성숙 - 천주교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주석
- ↑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6월 14일 확인
- ↑ "홍대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6월 14일 확인
참고문헌
- 저서
- 홍대용, 민족문화추진회, 『(新編 국역)홍대용 담헌서』,한국학술정보, 2008.
- 김태준, 『홍대용』, 한길사, 위대한 한국인, 1998.
- 김태준, 『洪大容 評傳』, 民音社, 대우학술총서, 1987.
- 논문
- 유재형, 「담헌 홍대용의 제일등인 논쟁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16.
- 어윤정, 「湛軒 洪大容의 科擧制 認識과 人材登用 改革論」,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4.
- 박성래, 「洪大容의 과학사상」, 『교수아카데미총서』, Vol.7 No.1 , 1994, 1-9쪽.
- 전상운 ,천관우 ,이원순, 『학술좌담 : 담헌 (湛軒) 홍대용』, 「韓國學報」, Vol.7 No.2 , 1981, 2181-2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