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신
황수신(黃守身) | |
대표명칭 | 황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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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黃守身 |
생몰년 | 1407년-1467년 |
본관 | 장수(長水) |
시호 | 열성(烈成) |
호 | 나부(懦夫) |
자 | 수효(秀孝), 계효(季孝)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수효(秀孝,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계효(季孝)로 되어 있다), 호는 나부(懦夫). 황균비(黃均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릉대도호부사 황군서(黃君瑞)이고, 아버지는 세종조의 명상 영의정부사 황희(黃喜)이며, 어머니는 양진(楊震)의 딸이다.[1]
1467년(세조) 영의정에 황희의 셋째 아들 황수신이 발탁 되었다. 이로써 황수신의 가문은 조선조 최초 부자(父子) 영의정을 낸 명문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2]
황희(黃喜) 정승과 아들 황수신에 관련된 이야기
황희 정승의 아들 황수신에겐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하게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수신이 밖에서 돌아오니, 황 정승이 관복을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까닭을 물었다. 황 정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아들로 대접했는데 도대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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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道雨, 『Daum 블로그 - 태극기사』, 황희 정승과 아들 황수신.[3] |
황수신은 계유정난을 지지하여 좌익공신에 관리가 되었으며, 세조의 명을 받아『법화경(法華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언해를 주관하였고,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의 찬진(撰進)[4]을 감독하였다.[5]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열성(烈成)이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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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 황수신 | A의 아들은 B이다 | A ekc:hasSon B |
황수신 | 계유정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한충희, "황수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道雨, "황희 정승과 아들 황수신",
『Daum 블로그 - 태극기사』online , 작성일: 2008년 02월 19일. - ↑ 道雨, "황희 정승과 아들 황수신",
『Daum 블로그 - 태극기사』online , 작성일: 2008년 02월 19일. - ↑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림. "찬진",
『네이버 어학사전』online . - ↑ "황수신",
『위키백과』online . - ↑ 한충희, "황수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 거리
- 緣田, "황희 정승과 아들 황수신",
『Daum 블로그 - 태극기사』online , 작성일: 2008년 0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