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혼수(混修)() | |
대표명칭 | 혼수(混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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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wanam |
생몰년 | 1320(충숙왕 7)-1392(태조 1) |
시호 | 보각(普覺) |
호 | 환암(幻菴) |
휘 | 혼수(混修) |
탑호 | 편광(遍光) |
자 | 무작(無作) |
성씨 | 조(趙) |
출신지 | 광주(廣州: 현재의 경기도 광주) |
승탑비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어느 날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 사슴 한 마리를 보았는데 사슴이 달아나면서 멈추고 되돌아보곤 하기를 거듭하였다. 활을 쏘려 하다가 이상하게 여겨 돌아보니 새끼가 어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짐승들이 새끼를 염려하는 것이 사람과 어찌 다르랴' 하고 곧 사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몇 개월 후 병을 앓다가 용주(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의 임지에서 죽었다.
스님은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하여 항상 병을 앓았다. 점장이에게 물었더니 "이 아이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영원히 병을 앓지 않고 항상 건강하여 마침내 큰 스님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나이 12세가 지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네가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사슴의 어미가 새끼를 염려하는 것을 보고 감득하여 사냥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니 이는 곧 네가 자인(慈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도리를 이미 강보(襁褓, 어린아이를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의 시절부터 나타내 보인 것이니 하물며 점장이의 말도 그와 같음이랴"라고 하였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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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혼수(混修)는 13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출생하였다. 휘(諱)는 혼수(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이다. 본성은 조씨(趙氏)로서 경기도 광주(廣州) 풍양현(豊壤縣)이 그 본관이다.[2]
아버지의 휘는 숙령(叔鴒)으로 헌부(憲府, 사헌부의 줄임말)[3]의 산랑(散郞)[4]이요, 어머니는 경씨(慶氏)로서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모두 사족(士族)이다.
출가수행
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 ||
출처: |
혼수는 계송(繼松) 대선사[5] 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전적을 배웠는데 총명이 남달라 스승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1348년 이웃사람이 급하한 것을 보고 더욱 정진해야 함을 느끼고 금강산(金剛山)에 입산한다.
1350년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경산(京山)에 주석한다. 5-6년 후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베껴 써 어머니의 명복을 빈다.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공 쌍중(趙公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3년 동안 머물다가 충주(忠州) 청룡사(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 집터를 고쳐 짓고 연회암(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다.
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거처하였다. 오대산에 머물고 있던 나옹 혜근화상(惠勤和尙)을 찾아가 자주 도(道)의 요지 질의하니, 나옹은 뒤에 금란가사(金襴袈裟)ㆍ상아불(象牙拂)ㆍ산형장(山形杖) 등 3가지 신물을 주었다.
1361년에 강릉도(江陵道) 안렴사(按廉使)가 혼수를 천거하였으나, 상경 도중에 은둔하여 정진한다. 1369년에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인 서운사(瑞雲寺)[6].에 혼수를 초빙하였다.
공부선
공민왕이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나옹을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나옹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은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공민왕은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혼수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나옹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중략) ... (중략) 나옹이 곧 고개를 끄덕이자, 공민왕이 유사(攸司)를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7] | ||
출처: |
입적
관련항목
참고문헌
각주
-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4쪽.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
-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4쪽. 각주 26.
- ↑ 고려 때 육조(六曹)에 소속되어 있던 관원으로 좌랑 또는 원외랑이라고도 하였으며 정6품이었다.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각주 28.
- ↑ 계송(繼松)은 고려사에서도 찾아지고 있는 계송(戒松)으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다.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10쪽
-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이다.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8쪽. 각주 67
- ↑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 「비명류」, 『양촌선생문집』 제37권.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