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사옥
병인사옥(丙寅邪獄) | |
대표명칭 | 병인사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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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丙寅邪獄 |
이칭 | 병인박해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66년-1871년 |
관련인물 | 흥선대원군 |
정의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내용
병인사옥이 일어나게된 원인
러시아의 남하와 조선 정부의 긴장감 고조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박해를 강행하게 된 데에는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 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숨어 있었다. 즉 1858년 6월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에 따라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1]
천주교도인이 러시아 남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주장하다
이 때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Berneux, 張敬一)와 만나볼 것을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고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 있었다.[2]
영불 연합군의 북경 함락과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유지하기위한 결정
1866년 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이 보고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3]
병인사옥이 진행되는 과정
초기 병인사옥의 진행과 그 여파로 병인양요의 발생
1866년 2월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는 물론 정의배(丁義培)·전장운(全長雲)·최형(崔炯)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이 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李福明)은 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4]
병인양요의 발생으로 더 심해진 천주교 박해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이러한 박해는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5]
신미양요와 더욱더 강화된 천주교 박해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병인사옥 | 흥선대원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에로우사건 | 텐진조약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텐진조약 | 병인사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천주교도 | 남종삼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천주교도 | 김면호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병인사옥 | 리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리델 | 로즈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로즈 | 병인양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미양요 | 병인사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66년-1871년 | 병인사옥이 일어났다 |
1856년 | 에로우사건이 일어났다 |
1858년 | 텐진조약을 맺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규성, 「병인박해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1860~1865년을 중심으로>」, 『누리와 말씀』, Vol 29, 2011, 81-124쪽.
- 조광, 「병인박해 그리고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순교'」,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45, 2016, 5-24쪽.
유용한 정보
- 이원순, "병인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