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開城 五龍寺 法鏡大師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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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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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城 五龍寺 法鏡大師碑 |
주소 | 개성시 용흥리 오룡사터 |
문화재 지정번호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3호 |
찬자 | 최언위(崔彦撝) |
서자 | 선경(禪扃)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경유(慶猷) |
건립연대 | 944년 |
승탑 |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탑 |
정의
개성시 용흥리 오룡사(五龍寺) 터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871-921)의 탑비.
내용
개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3호다.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의 비로, 944년(혜종)에 건립했다. 용흥리 용암산 극락봉 남쪽 기슭의 오룡사(五龍寺) 터에 있는 법경대사탑(法鏡大師塔) 바로 옆에 있다.[1]
높이 3.4m, 지대석 길이 2.2m, 너비는 2m이고, 비신 앞뒷면에는 명문만 있을 뿐 아무 장식이 없다.[2]
비문은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승려 선경(禪扃)이 해서(楷書)로 써서 대사가 입적한 23년 후인 944년(혜종 원년)에 세웠다.[3]
앞면 가운데 부분에 '법경대사(法鏡大師)'라는 비명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오룡지사(五龍之寺)'라는 절 이름이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져 있다.[4]
귀부(龜趺)와 비신, 이수(螭首)를 갖춘 전형적인 비의 양식이며, 비신 하단부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다. 행서(行書)로 쓴 음기 부분은 마모가 훨씬 심하여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5]
비문
비문 내용은 법경대사가 탄생하여 출가하여 당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형미(逈微),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여엄(麗嚴), 수미산문(須彌山門)의 이엄(利嚴)과 함께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로 불리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궁예(弓裔)도 만나고 태조를 만나 왕사(王師)의 예우를 받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한 것이다. 뒷면에는 비 제작을 담당한 승려를 명기했고, 태조와 여러 호족 그리고 최언위(崔彦撝) 등 중앙관료로 이루어진 재학제자(在學弟子)의 관위와 성명을 열거하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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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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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 경유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 개성 오룡사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 개성 오룡사 | A는 B에 있었다 | A edm:formerLocation B |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 최언위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A ekc:writer B |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 선경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주석
- ↑ "오룡사 법경대사비",
『두산백과』online . - ↑ "오룡사 법경대사비",
『두산백과』online . - ↑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오룡사 법경대사비",
『두산백과』online . - ↑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오룡사법경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