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海州 廣照寺 眞澈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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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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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州 廣照寺 眞澈大師塔碑 |
주소 |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
문화재 지정번호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85호 |
찬자 | 최언위(崔彦撝) |
서자 | 이환상(李奐相) |
각자 | 상신(常信)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이엄(利嚴) |
건립연대 | 937년 |
정의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廣照寺) 터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 870-936)의 탑비.
내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였던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의 비로, 937년(태조 20)에 세워졌다. 높이는 2m, 너비는 1m이며, 받침돌 높이는 1m이다.[1] 고려 건국에 공이 컸던 진철대사가 죽은 다음해에 태조가 '진철(眞澈)'이라는 시호와 함께 '보월승공(寶月乘空)'이란 탑비명을 짓고,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대사의 도학과 생애를 적은 비문을 지어 새긴 것이다.
귀부(거북받침), 비신, 이수(용틀임)로 이루어졌다. 거북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으며, 두 눈은 부릅뜨고 입은 크게 벌린 상태이다. 거북 등 가운데에 직사각형의 비좌를 설치하고 대리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비문은 비의 앞면에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이수(螭首)는 낮은 구름과 힘찬 용무늬를 새긴 신라 말의 양식이다. [두산]
거북이의 네 발은 바닥돌을 힘있게 딛고 있고, 거북등에는 왕(王)자를 새겨 넣었다. 거북머리는 용머리처럼 생겼다.
비의 앞면에 만 해서체로 된 비문이 새겨졌다. 이수는 네 모서리 쪽으로 머리를 둔 네 마리의 용이 운동감이 넘치게 새겨졌며, 그 앞면 방형의 구획 안에 비명을 새겼다. 빗머리의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작은 연꽃잎들을 새겼다.[2]
비문은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었고, 이환상(李奐相)이 썼으며, 상신(常信)이 새겨서 진철대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937년(고려 태조 20)에 세웠다. 현재 35행에 1행 77자의 비문 구성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사의 가계와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출가와 수행 및 중국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어 귀국하고 귀국 후에 교화한 활동을 서술하였으며 입적과 비를 세우는 과정에 이은 명(銘)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말 선사들의 출가와 수계 그리고 입당 수학과 귀국 및 당시 호족들과의 관계, 그리고 개경에 가까운 해주 수미산에 산문이 설립되는 과정을 통해 본 고려 태조의 불교계 정책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부터 금석 관련 문헌에 실려 알려졌고 탁본도 남아 있다.[3]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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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조사진철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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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이엄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해주 광조사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해주 광조사 | A는 B에 있었다 | A edm:formerLocation B |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최언위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A ekc:writer B |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이환상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 상신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A ekc:inscriber B |
주석
- ↑ "광조사 진철대사 탑비",
『두산백과』online . - ↑ "황해남도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대한민국과 세계의 문화재』online , 이글루스. - ↑ "광조사진철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