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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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언이(尹彦頤) | |
대표명칭 | 윤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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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尹彦頤 |
생몰년 | 1090년(선종 7)-1149년(의종 3) |
본관 | 파평(坡平) |
시호 | 문강(文康) |
호 | 금강거사(金剛居士) |
부 | 윤관(尹瓘) |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
내용
윤언이(尹彦頤)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윤관(尹瓘)의 아들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인종 때 기거랑(寄居郞)이 되어 정지상(鄭知常), 권적(權適) 등과 함께 정치 제도의 개혁에 참여하였다. 1128년(인종 6)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송나라에 파견되어 국교 재개를 청하고 돌아왔으며, 1132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경연(經筵)에서 강의하고 화서대(花犀帶)를 하사받았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해 서경을 함락시키는데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겨났다. 1147년(의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예종, 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周易)』에 밝았다. 말년에는 파평(坡平)에 은퇴하여 살았다. 저서로 『역해(易解)』가 있다.[1]
김부식과의 갈등
『고려사』 윤언이 열전에는 윤언이와 김부식과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술하는 야사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 중기 정치, 사상계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보다 앞서 윤관(尹瓘)이 왕의 조서를 받들어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비문(碑文)을 찬술하였는데, 뛰어나지 못했으므로 그 문도(門徒)가 은밀하게 왕에게 아뢰어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고쳐 짓도록 하였다. 그때 윤관이 상부(相府)에 있었는데,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끝내 〈비문을〉 찬술하니 윤언이가 그 일로 마음에 원한을 품었다. 어느 날 왕이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하게 하고, 윤언이로 하여금 어려운 대목에 대하여 토론하도록 명령하였다. 윤언이가 『주역』에 대하여 매우 밝아 거침없이 따져 물으니, 김부식은 응답하는 것이 어려워 얼굴에 진땀을 흘렸다. 윤언이가 〈김부식의〉 부하가 되자 김부식이 〈왕에게〉 아뢰기를, “윤언이는 정지상(鄭知常)과 더불어 서로 깊이 마음을 통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하니, 이에 양주방어(梁州防禦)로 폄출하였다. | ||
출처: 『고려사』권96 열전 9 윤언이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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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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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온라인 참조: "윤언이", 고전문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연식, 「〈大覺國師碑〉의 建立過程에 대한 새로운 고찰」, 『한국사연구』83, 한국사연구회, 1993, 53쪽.
- ↑ "윤언이가 김부식과 대립하다", 고려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