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대첩
@ 일러 삽입예정
사수대첩(蛇水大捷) | |
대표명칭 | 사수대첩 |
---|---|
한자표기 | 蛇水大捷 |
유형 | 전투 |
시대 | 삼국 |
날짜 | 662년 |
관련인물 | 연개소문,방효태 |
관련장소 | 사수 |
목차
정의
662년 사수 유역에서 고구려와 당나라가 벌인 전투.[1]
내용
배경
당나라는 태종(太宗) 때인 644년과 647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모두 크게 패했고, 649년 태종이 죽은 뒤에는 한동안 고구려를 침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660년(보장왕 19년) 11월에 이어 661년(보장왕 20년) 봄 4만4천여 명의 병사를 고구려에 추가 파병했다. 나아가 여름 4월에는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행군총관,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35만의 병력을 이끌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2]
전개
소정방이 이끈 평양도행군의 병력은 661년 가을 8월에 패강(浿江)에서 고구려군에 승리를 거두어 마읍산(馬邑山)을 점령하고 평양성을 포위했다. 당나라 군대가 요동 방면으로도 침공해오자 9월에 연개소문은 아들인 연남생(淵男生)을 보내 압록강을 경계로 당나라 군대를 막게 했다. 연남생은 당나라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였으나, 겨울이 되어 강이 얼자 계필하력이 이끈 당나라 군대는 얼음 위로 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고구려군은 패했고 3만여 명의 병사를 잃었으나, 계필하력이 이끈 요동도행군 병력은 곧 물러났다.
그러자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 군대는 662년 봄 정월에 사수 유역에 주둔하던 당나라의 옥저도행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방효태가 이끈 옥저도행군은 전멸했으며, 방효태도 그의 열세 명의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3]
결과
사수 전투에서 방효태의 군대가 전멸되자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의 군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 지원을 받고 철수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정영열-연개소문의 사수싸움 | 사수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A ekc:depicts B |
정영열-연개소문의 사수싸움 | 사수대첩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정영열-연개소문의 사수싸움 | 연개소문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사수대첩 | 사수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연개소문 | 사수대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연개소문 | 임아상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연개소문 | 방효태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사수전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사수전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사수전투",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위키백과 기여자, "사수 전투",
『위키백과』online , 작성일: 2017년 6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