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
장만(張晩) | |
대표명칭 | 장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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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張晩 |
영문명칭 | Jang Man |
생몰년 | 1566년-1629년 |
본관 | 인동(仁同) |
시호 | 충정(忠定) |
호 | 낙서(洛西) |
자 | 호고(好古)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낙서집(洛西集) |
대표직함 |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
부 | 장기정(張麒禎)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개요
장만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1]
이조판서(吏曹判書)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이고, 아버지는 군수 장기정(張麒禎)이며, 어머니는 백천 조씨(白川 趙氏)로 조광침(趙光琛)의 딸이다.[2]
업적
국방을 책임지다
1598년(선조 31) 장만은 황해도 봉산군수로 나가 임진왜란 후 아직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서로(西路) 지역의 수습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왜구의 축출을 이유로 평안도 지역에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도내의 수령들이 매를 맞고 욕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표현될 정도로 이들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러나 장만이 봉산군수로 부임한 후 명나라 군과의 마찰은 사라졌고, 봉산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이어졌다고 한다.[3]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였고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중심의 북인정권이 수립되었다. 북인정권의 수립은 기존에 권력을 잡았던 서인들과 남인들의 정치적 소외를 가져오게 하였지만, 실무관료의 능력, 특히 국방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장만의 능력은 광해군 정권에서도 계속 되었다.[4]
장만은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와 체찰부사, 병조판서 등 국방 방어와 관련된 요직을 두루 맡았다. 당시 북방의 여진족이 강성하여 조선 국경에 현실적인 위협이 되고 있어서 능력을 갖춘 국방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5]
광해군 시대 북방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지속되는 곳이었다. 1608년 9월 21일 장만은 비변사에 북방오랑캐가 가을에 쳐들어올 수 있으니 오랑캐의 정황을 조사하고 방비를 엄격하게 해야 함을 보고하였고, 훗날 청나라 초대황제가 되는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틈이 생겨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6]
1610년 11월에는 여진족 지역의 산천을 그린 지도를 바치기도 했다. 적의 형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이 지도를 옆에 놔두고 유념해 보도록 하겠다.’면서 현장지휘관 장만의 건의에 화답했다고 한다.[7]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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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정 | 장만 | A는 B의 어버이이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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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이장희, "장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장희, "장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병주, "장만",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발행일: 2012년 7월 16일. - ↑ 신병주, "장만",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발행일: 2012년 7월 16일. - ↑ 신병주, "장만",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발행일: 2012년 7월 16일. - ↑ 신병주, "장만",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발행일: 2012년 7월 16일. - ↑ 신병주, "장만",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발행일: 2012년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