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성강
예성강(禮成江) | |
대표명칭 | 예성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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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禮成江 |
이칭 | 안북하(安北河), 북하(北河) |
유형 | 강 |
주소 | 황해북도 수안군, 황해남도 배천군, 황해남도 개성시 개풍군 |
관련인물 | 이녕(李寧) |
관련장소 | 벽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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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황해북도 수안군 언진산에서 발원하여 황해남도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사이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1]
내용
개요
길이는 187.4km, 유역면적은 3,916.3km2로 북한에서 15번째로 큰 강이다. 고려에서 중국의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워 예절 있게 맞아들이고 다시 바래다 주었던 강이라 예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2]
형성 및 변천
본래 상류는 곡산천이었으나 제4기 하세에 현무암이 분출되어 용암대지가 형성되고 물길이 막히면서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성강 유역은 고대 낙랑군에 속하였고 뒤에는 대방군에 예속되었다. 백제에 병합되었다가 광개토왕 당시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의 멸망 뒤 당나라의 영토가 된 적도 있으나 곧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예성강은 안북하(安北河) 또는 북하(北河)라고도 불렸고 고려 초에 왕건이 송악(松岳)을 본거지로 해상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싸울 때 이곳이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예성강의 수운은 벽란도(碧瀾渡)가 고려 송도의 배후 관문 구실을 담당하여 번영을 누렸다.
연안에는 여러 곳에 포구가 있었고 그 중 연백군 유곡면의 금곡포(金谷浦)는 유명한 포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근에 금곡연이 있고, 또한 금곡포창이 있어 연안·배천은 물론 해주·신천·풍천·장연·문화 등 여러 고을의 전세 양곡을 이곳에서 수납하여 서울로 조운하였다.”고 한다.[3]
관련 사실
고려 시대 송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을 때의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禮成江曲)」, 고려의 화원 이녕(李寧)이 사신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휘종(徽宗)의 요청으로 그린 「예성강도(禮成江圖)」 등 예성강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 작품들이 다수 존재했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근방에 북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락리어름치, 쉬리산란지(제187호), 구락리자라서식지(제186호)가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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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포 | 예성강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벽란도 | 예성강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박성환-예성강도 | 예성강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A ekc:depicts B |
박성환-예성강도 | 벽란도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예성강도 | 예성강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예성강곡 | 예성강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예성강도 | 이녕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김주환, "예성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주환, "예성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주환, "예성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