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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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1일 (월) 15:24 판 (시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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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論介)
초상화 논개 표준영정.png
대표명칭 논개
한자표기 論介
생몰년 -1593년
시대 조선
대표직함 기생



정의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내용

논개 설화의 구전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1]

문헌 속의 논개

1620년 경부터 논개의 이야기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논개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또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다. [2]

논개의 사당과 추모비 건립

조선 경종 이후,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더불어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였다.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졌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3]

논개의 추모제

1739년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졌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4]

논개의 신분 논의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 출신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논개 임진왜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진주성 논개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유몽인 어우야담 A는 B를 저술하였다
논개 어우야담 A는 B에 언급되었다 1620년경
의암사적비 최진한 A는 B가 건립하였다 1721년
의암사적비 논개 A는 B를 위한 비이다
의암 논개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20년경
의기사 논개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의기사 남덕하 A는 B가 건립하였다 1739년
장현석 의암별제 A는 B를 주도하였다 1868년
교방가요 의암별제 A는 B를 묘사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20년경 논개어우야담에 기록되었고, 그녀를 기리는 의암이 만들어졌다.
1721년 최진한논개를 기리는 의암사적비를 건립하였다.
1739년 남덕하논개를 기리는 의기사를 건립하였다.
1868년 장현석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를 주도하였다.

주석

  1. 유승주,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유승주,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유승주,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유승주,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유승주,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이병태, 『석봉 한호의 생애』, 석봉한호 기념사업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