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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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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2일 (토) 18:42 판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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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混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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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혼수
영문명칭 Honsu
한자 混修
생몰년 1320(충숙왕 7)-1392(태조 1)
시호 보각(普覺)
환암(幻菴)
혼수(混修)
탑호 편광(遍光)
무작(無作)
성씨 조(趙)
출신지 광주(廣州: 현재의 경기도 광주)
승탑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혼수의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혼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 문집류에는 환노(幻老) 또는 환옹(幻翁)이라고도 지칭한 사례가 있다.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에 그의 아버지가 부임한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 용궁면(龍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헌부산랑 조숙령(풍양 조씨)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이다.[1] 아버지가 사냥 나갔다가 새끼를 품은 사슴을 만나 사냥을 그만 두고 돌아와 곧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친가로 돌아왔다. 혼수는 어려서 몸이 약하여 병을 앓았는데 출가하면 건강하고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점술사의 예언에 따라 어머니의 추천으로 계송(繼松) 대선사에게 12세 출가한다.[2][3]

Quote-left.png 어느 날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 사슴 한 마리를 보았는데 사슴이 달아나면서 멈추고 되돌아보곤 하기를 거듭하였다. 활을 쏘려 하다가 이상하게 여겨 돌아보니 새끼가 어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짐승들이 새끼를 염려하는 것이 사람과 어찌 다르랴' 하고 곧 사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몇 개월 후 병을 앓다가 용주(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의 임지에서 죽었다.

스님은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하여 항상 병을 앓았다. 점장이에게 물었더니 "이 아이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영원히 병을 앓지 않고 항상 건강하여 마침내 큰 스님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나이 12세가 지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네가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사슴의 어미가 새끼를 염려하는 것을 보고 감득하여 사냥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니 이는 곧 네가 자인(慈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도리를 이미 강보(襁褓, 어린아이를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의 시절부터 나타내 보인 것이니 하물며 점장이의 말도 그와 같음이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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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출가수행

혼수는 1341년(충혜왕 2)에 선시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이 때 고승 및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29세인 1348년(충목왕 2) 가을에 이웃사람이 급사함을 보고 수도에 더욱 정진할 것을 맹서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장좌불와로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여 경산(京山,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주석하며 어머니를 5-6년간 보살피고 어머니가 운명하자 『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여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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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사년(충혜왕 2, 1341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유생과 석문의 친구들과 날마다 어울려 다녔으나, 자신은 항상 생명의 환화(幻化)가 일정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초연히 명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두었다. 그러다 갑자기 외가 동네에 비명에 죽은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비감(悲感)한 생각이 들어 입산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를 하직하고 떠나갈 무렵에 둥근 해가 선사의 얼굴을 비치는 꿈을 꾸었다. 이미 경사로운 징조임을 깨닫고 곧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으니, 지정 8년 무자(충목왕 4, 1348년) 가을로 이때 선사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음을 다잡고 잠도 자지 않으며 잠시도 몸을 눕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공부를 2년 동안 정진한 후, 그 어머니가 애태우며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고는 경산(京山)에 우거하면서 감히 멀리 돌아다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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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혼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이 법회에서 공민왕이 그의 도를 듣고 회암사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같은 산내의 고운암에 머물고 있는 나옹 혜근을 찾아가 자주 질의하고 입실을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금란가사와 상아불자 산형주장자를 신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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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동안 이와 같이 지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람을 시켜《대자묘법화경(大字妙法華經)》을 써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선원사(禪源寺)에 가서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배알하고, 그에게《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깊이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작고한 재상 조공 쌍중(趙公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수릉(首楞)》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는데, 청아하게 뽑아내는 말재주가 있어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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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활동

1361년(공민왕 10) 가을에 강릉도 안겸사가 혼수를 천거하여 궁궐로 나아가 왕실과 신료들에게 보살계를 받도록 하였으나, 상경 도중에 숨어 정진하였고, 1369년 김황(金璜)의 원찰(願刹)인 서운사(瑞雲寺)에서 선회(禪會)를 크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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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공민왕 10, 1361년) 가을에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에게 명하여 선사를 모셔다 대궐에 나가 강단(講壇)의 자리를 주장하게 하니, 선사는 도중에 도망쳐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고 명산을 편력하여 그 지조를 더욱 굳건히 지켰다. 기유년(공민왕 18, 1369년)에는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 서운사(瑞雲寺)에 선사를 맞이하였는데, 선사께서 이르자 승당(僧堂)을 열고 낭무(廊廡)를 수리하여 선회(禪會)를 크게 여니, 사방의 승려들이 소문을 듣고 와 배알하는 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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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1370년(공민왕 19)에 나옹 혜근이 회암사에서 공부선을 개최하였는데 그가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그는 회암사의 주지를 하라는 왕명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위봉산에 은둔하였다. 1372년 왕명으로 호불사(護佛寺)에, 이듬해에는 내불당(內佛堂)에 머물렀으나, 밤에 빠져나와 평해의 서산(西山)으로 갔다가 1374년 다시 내원에 들어가 공민왕에게 불법를 가르쳤고, 특히 왕대비의 존경을 받았다. 그 해 9월 우왕이 즉위,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의 호를 내렸다. 1375년(우왕 1) 송광사에 머무르고, 이듬해 서운사로 돌아갔다. 1378년 치악산에서 연회암으로 돌아왔다가 왕의 청으로 광암사(光巖寺)에서 3년을 지낸 뒤, 밤에 도망하여 원주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문사·청평사·치악산 등을 편력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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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3년 경술(공민왕 19, 1370년) 가을 7월에, 임금께서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나옹에게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임금께서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나옹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 가운데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임금께서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나옹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입문구(入門句)를 물으니, 선사는 즉시 문안으로 들어와 '들어오니 도리어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고 대답하고, 또 문내구(門內句)를 물으니 '안과 밖이 본래 공(空 :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데 중(中)이 어떻게 성립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또 삼관(三關)으로 묻기를 '산은 어찌하여 멧부리에서 그치는가?' 하니, '높으면 곧 낮아지고 낮아지면 곧 그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물은 어찌하여 개울을 이루는가?' 하니, '바다가 숨어 흐르는 곳마다 개울이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밥은 어찌하여 백미로 짓는가?' 하니, '만약 모래로 찐다면 어떻게 좋은 음식이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곧 고개를 끄덕이었다. 임금께서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선사께서는 임금께서 내원(內院)에 머물게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남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위봉산(圍鳳山)에 숨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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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1383년 4월 1일 왕이 어서·인장·법복·예폐(禮幣) 등을 연회암에 보내어 국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렸으며, 충청북도 충주의 개천사(開天寺)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1384년 해적이 충주를 침범하자 왕의 청에 의하여 광암사로 옮겼다. 다음 해 가을에는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의 주맹(主盟)이 되었으며, 1386년 보국사(輔國寺) 불정회(佛頂會) 및 수창궁(壽昌宮) 소재석(消災席)에 초청받아 주관하였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옮겨 머물다가,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표문을 올리고 치악산으로 돌아갔지만 몇 달만에 다시 국사에 봉하여져 개천사로 옮겼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1391년(공양왕 3) 서운사에 봉안하고 경회(慶會)를 베풀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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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년(우왕 9, 1383년) 2월에 조정의 의논이 옛 제도에 따라 석문(釋門)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 세워서 사범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당시 물망이 모두 선사에게로 주목되었다. 선사께서 이 말을 듣고 은퇴하기를 꾀하니, 문인 감로장로(甘露長老) 경관(慶觀)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안정하려는 계책뿐입니다. 지금 나라 임금이 불법(佛法)을 존숭하는 의미에서 이 일을 거행하려는 것이니, 그 취지가 매우 훌륭합니다. 선사께서는 사범이 되어 다소나마 안정하여 함부로 움직임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선사께서 끝내 가지 않자, 여름 4월 초1일 갑술일에 왕이 상신(相臣) 우인열(禹仁烈) 등에게 어서(御書)ㆍ인장(印章)ㆍ법복(法服)ㆍ예폐(禮幣)를 받들어 보내 선사가 계신 연회암에 나와서 국사(國師)로 책봉하는 동시,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변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리게 하고,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상주하는 곳을 삼았다. 그해 가을에 서운산(瑞雲山)으로 가니, 왕은 또 정랑(正郞) 박원소(朴元素)에게 안마(鞍馬)를 주어보내 모셔 오게 하였다.

이듬해 갑자년에 해적(海賊)이 깊이 들어와 충주를 침범하므로, 조정에서는 걱정하기를 “개천사 주위가 해적의 소굴이 될 터인데 선사께서 거기에 머무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여, 왕에게 아뢰어 사람을 보내 광암사(光巖寺)로 맞아 왔다. 광암사에 이르자 상언(上言)하기를, "노승(老僧)이 개천사를 사양하지 못하고, 또 광암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 하나를 맡는 것도 노승의 본뜻에는 어긋나는데 둘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노승으로 하여금 선군(先君)의 명복을 비는 데 전심하게 하시려면 개천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개천사는 선사께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 그 음덕을 입을 곳이요, 광암사는 내가 청하여 연법(演法)하게 한 곳이니, 둘 다 겸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므로, 선사께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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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입적

1392년 9월 18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6]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이 60세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태조에게 알리니, 태조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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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에 우리 주상께서 혁명하여 왕업을 열자 선사께서는 즉시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직위와 절[寺]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함께 인(印)을 보낸 다음 청룡사로 행장을 옮겼다. 시자(侍者) 담원(湛圓)이 전문과 인을 받들고 대궐에 나가니, 임금의 뜻이 전과 같이 스스로 섬기고자 해서 곧 인을 되돌려 보냈다.

(중략)

9월 18일 병신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 :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의 끝이나, 맨 끝에 4자로 된 글귀로 묘한 뜻을 읊어 놓은 운문)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8일 동안 상(床)에 앉았으되 얼굴이 평시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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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권근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충주 청룡사 A는 B에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혼수 A는 B를 위한 비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혼수 는 -를 위한 승탑이다
혜근 혼수 A는 B의 스승이다
계송 혼수 A는 B의 스승이다
식영감 혼수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만우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소안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희진 A는 B의 스승이다
혼수 불호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송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서운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광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오대산 신성암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내불당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개천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혼수 이성계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이직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공민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창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우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공양왕 A는 B와 관련있다
혼수 목은집 A는 B에 기록되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황인규, 105쪽.
  2. 황인규, 105쪽.
  3. 민백
  4. 민백
  5. 민백
  6.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 "임종게(臨終偈)", 두산백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