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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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17일 (화) 10: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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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周時經)
한글팀 주시경.jpg
대표명칭 주시경
한자표기 周時經
생몰년 1876-1914
본관 상주(尙州)
한힌샘, 백천(白泉)
시대 근대
국적 조선/대한제국
대표직함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주학원(周鶴苑)
연안이씨


정의

주시경(1876∼1914)은 근대의 국어학자이다.

내용

생애

주시경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 상주 주씨 주세붕의 후예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훈장을 하던 아버지 학원(鶴苑)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호는 한힌샘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13세 되던 1889년에 큰아버지 학만(鶴萬)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나왔다.

  • 배제학당에서 학문의 토대를 세우다

1896년 4월 배재학당에 재입학하여 1898년에 역사지지 특별과를, 1900년에 보통과를 졸업했다.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배재학당에서의 경험은 주시경의 이후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영문법을 공부하며 언어학의 이론을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세계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던 서재필이 주도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참여하며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협성회에 참여하다

협성회는 배재학당의 학생단체로 매주 시국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주시경은 한글로 간행된 『 협성회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또한 독립협회가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 『 독립신문』의 회계 및 교정을 맡아, 1896년에는 신문의 한글 표기를 합리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독립신문사 안에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결성해 한글을 연구하면서, 한글을 전용하고 맞춤법을 제정할 것을 주장하는 등 실제적 측면에서 국어 연구를 본격화했다.

1907년에는 지석영(池錫永)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고, 같은 해 7월부터는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에 설치된 국문연구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국문연구소는 국문의 원리와 연혁, 현재의 상태와 장래의 발전 방법 등 한글 전반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 단체로, 1909년까지 총 23회의 회의를 거듭하고 일반의 견해도 모아서 의견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재정난과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한글 철자법을 공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어 교육을 계속하는 동시에, 최남선(崔南善)이 조선의 고서를 간행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어와 관련된 고서를 교정하고 국어사전의 편찬을 준비했다.

주시경이 한글 교육의 본거지로 삼았던 상동교회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주시경과 그 제자들 중에는 대종교 신도가 되거나 상동교회와 신민회를 매개로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등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등, 문화운동을 넘어 정치 혁명을 지향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주시경은 이때 국외 망명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급격한 복통을 호소하며 앓다가 1914년 7월,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가족으로는 21세인 1897년에 결혼한 부인 김명훈과 그 사이에서 낳은 2녀 3남이 있다.

학문적 특징

  • 한글 연구에 뜻을 세우다

주시경이 처음 한글 전용을 주장한 것은 우리말과 일치하는 한글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신학문을 보급하고 나라의 자강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었다.1 897년 4월 22~23일자 『독립신문』에 기고한 국문론(國文論)에서는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보다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훨씬 배우기 쉽고 유용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남녀노소 상하 빈부 귀천 없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모든 일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이로써 의회, 내무 외무, 재정, 법률, 육해군, 경제학 등 실상에 유익한 학문을 익혀 "우리나라 독립에 기둥과 주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국수주의적 국어관

이처럼 한문을 폐지하고 한글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문자를 대중화하여 실력을 양성한다는 계몽적인 측면 외에,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조선의 독자성을 추구하려는 흐름과도 궤를 같이 했다. 조선 정부도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언문으로 업신여겨 왔던 한글을 '국문(國文)'이라 칭하고, 공문서나 관보에 국문 또는 국한문을 사용하게 하는 등 정책적으로 국어와 국문을 보급하려 했다. 주시경의 경우,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국문을 자주독립의 상징이자 고유의 민족문화로 인식하는 국수주의적 인식을 본격화하였다.

  • 학문적 특징

주시경은 배제학당 졸업 후에도 1900년에는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토지 측량을, 1906년부터 3년간은 유일선(柳一宣)이 세운 정리사(精理舍)에서 수학과 물리를 배우는 등 이과 계통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학문 방법을 익힌 것이 주시경이 분석적으로 국어를 연구한 배경이 되었다.

활동

  • 학문활동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으로 형성된 후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지고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민백》

  • 교육활동

주시경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 교육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민백》

의의

주시경이 세운 교육기관을 수료한 강습생은 500여명에 달했고, 그 중 이병기, 권덕규, 최현배, 정열모 등이 조선어학회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어강습소를 함께 수료한 주시경의 애제자 최현배와 김두봉이 해방 후 남북의 초기 언어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과 북의 한글 표기는 거의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있다. 즉, 한글 전용, 문법적 형태를 살린 표기, 가로쓰기 등은 주시경이 현대에 남긴 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