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칠백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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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7일 (월) 17:20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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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민족기록화팀(2017년 3월 31일 촬영)
대표명칭 금산 칠백의총
한자표기 錦山 七百義塚
이칭 칠백의총
유형 유적
시대 조선
지정번호 사적 제105호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소장처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관련인물 조헌, 영규
관련장소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정의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을 비롯한 700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무덤.

내용

1592년(선조 25) 8월 18일의 제2차 금산전투에서 조헌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 등 700인의 의사가 금산에서 순절하자,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 전승업(全承業) 등이 유골을 모아 하나의 큰 무덤을 만들고 이를 '칠백의총'이라 하였다.br/> 그동안 불교계에서는 조선 시대 뿌리 깊은 배불(排佛)정책으로 인해 승장 영규와 8백 명의 승군은 금산 칠백의총에 함께 묻히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1603년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그 뒤 1647년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에 ‘從容祠’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하였다.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하여 옆에 종용당서원(從容堂書院)도 세워졌다. 그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70년 국가에서는 경역을 2만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ㆍ기념관ㆍ순의탑 등을 새로이 지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졌고, 1634년에는 순의단(殉義壇)을 세워 해마다 8월 18일에 제향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종용사(從容祠)를 건립하여 700의사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일제가 그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파괴한 것을 1963년에 정화작업을 하면서 묘역을 넓히고, 1968년에는 종용사를 다시 지어 묘역을 조경(造景)하였으며, 1976년에 기념관 ·칠백의사순의탑, 한글의 ‘일군순의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건립하였다.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금산 칠백의총 민백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8278&cid=40942&categoryId=33542 금산 칠백의총 두산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헌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영규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금산 칠백의총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A는 B와 인접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대한뉴스 제 1101호-박정희 대통령, 칠백의총 시찰(게시일: 2016년 12월 8일)

  • 대한뉴스 제 1257호-칠백의총 순의 제향(게시일: 2016년 12월 8일)

  • [반만년의 역경을 이겨낸 한민족의 역사 현장]금산 칠백의총 (사적 제105호)(게시일: 2016년 2월 12일)

주석

  1.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3월 31일)
  2.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3월 31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