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
최우(崔瑀) | |
대표명칭 | 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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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崔瑀 |
생몰년 | 미상-1249년(고종 36) |
본관 | 우봉(牛峰) |
이칭 | 최이(崔怡) |
시호 | 광렬(匡烈) |
시대 | 고려 |
부 | 최충헌(崔忠獻) |
자녀 | 최만종(崔萬宗), 최항(崔沆) |
정의
고려 후기의 권신.
내용
1219년(고종 6)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아버지 최충헌(崔忠獻)의 뒤를 이어 집권하여, 민심수습에 나섰다. 아버지가 축재한 금은보화 등을 왕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탈취했던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가난한 선비를 등용하고 아버지에게 아부하거나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와 아우 최향(崔珦)을 유배 또는 파면했다.[1]
1225년(고종 12) 정방(政房)을 자택에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자택에 서방(書房)을 두어 문객(門客) 중의 명유(名儒)를 포섭하고 정치에 이용하였다.[2] 이 때 서방에 기거했던 문인들로는 이규보, 이인로 등이 있으며,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을 편찬하였다.[3]
또한 최우는 기병부대인 마별초(馬別抄)[4]와 도적을 막기 위한 일종의 특수 군대인 야별초(夜別抄)[5]를 조직하였다.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三別抄)로 확대 및 개편되어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서 경찰과 전투의 임무를 맡았다.[6]
최우는 북변에 침범했던 몽골병의 대군이 곧 침범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고종 19)년 왕에게 강화(江華)로의 천도(遷都)를 청하고 녹전차(祿轉車) 1백여 대로써 자기 가재(家財)를 강화에 옮긴 뒤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하게 하였다. 1234년(고종 21) 강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했다.[7]
1245년(고종 32)에는 강화에 자신의 원찰인 선원사(禪源寺)를 창건하였으며,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 混元)을 법주(法主)로 삼고 낙성회를 개최하였다.[8]
최우는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강화에서 대장경(大藏經) 재조(再雕)에 착수하게 하였다. 이는 그가 죽고 2년 뒤인 1251년에 완성을 보았다.[9]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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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주석
- ↑ "최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최우",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황병석,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신원문화사, 2001. 온라인 참조: "서방", 학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온라인 참조: "마별초",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온라인 참조: "야별초",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민병하,
"최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3월 14일.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최우",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상길,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88 선원사(禪源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민병하,
"최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