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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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섭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31일 (월) 17: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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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상원사
(上院寺)
대표명칭 평창 상원사
한자표기 上院寺
영문명칭 Sang-won-sa



정의

평창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절이다.

내용

상원사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가 중대 지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며,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 만인 705년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이어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이후 몇 차례 중창되다가 1907년 수월화상이 방장으로 있을 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1951년 입적한 방한암 스님이 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방한암스님이 한국전쟁 때 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또한 매우 유명하다. 방한암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분이다. [1]

역사

  • 삼국시대

상원사는 705년(성덕왕 4)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에 의해 세워진 절이다. 상원사라는 명칭은 조선기에 붙여진 것이며 창건 초기에는 진여원(眞如院)이라 불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20여년 전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는 중대 남쪽 진여원 터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 때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올랐다. 보천은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운 뒤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의 지원을 받았다.[2]

  •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에 ""고려 말 극도로 황폐해진 절터를 본 영령암(英靈庵)이 절을 새로 짓고자 했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보태서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완공하였다.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3]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화되었으나 이 절은 오히려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마저도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짓게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위해 건립한 사찰)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상원사 경내 유물은 대부분 이 때 만들어졌다.[4]

  • 해방이후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가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5]

관련설화

‘단종애사’의 악역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얼마 못 가 괴질에 걸리게 된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세조가 월정사에 들러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 이른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며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어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하여 나무를 조각하였다. 이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을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모셨다.[6]
다음 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는 또 한 번 이적을 경험했다. 상원사 불전으로 올라가 예불을 드리려는 세조의 옷소매를 고양이가 나타나 물고 못 들어가게 했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가 밖으로 나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게 하자, 탁자 밑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덕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의 밭’이라는 뜻의 묘전을 내렸다. 세조는 서울 가까이에도 여러 곳에 묘전을 마련하여 고양이를 키웠는데, 서울 강남구에 있는 봉은사에 묘전 50경을 내려 고양이를 키우는 비용에 쓰게 했다고 한다.[7]

주석

  1. 상원사 박종철,『답사여행의 길잡이』 3 동해ㆍ설악, 돌베개, 1994, 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2017년 4월 5일 확인,
  2.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년 4월 5일 확인, 발췌 및 인용.
  3.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년 4월 5일 확인, 발췌 및 인용.
  4.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년 4월 5일 확인, 발췌 및 인용.
  5.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년 4월 5일 확인, 발췌 및 인용.
  6. 적멸보궁이 있는 상원사 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다음생각, 2012. 417년 4월 5일 확인, 발췌
  7. 적멸보궁이 있는 상원사 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다음생각, 2012. 417년 4월 5일 확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