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신한첩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 |
대표명칭 | 숙명신한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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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淑明宸翰帖 |
이칭 | 신한첩 |
저자 | 조선 효종, 조선 현종, 장렬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 |
시대 | 조선 |
소장처 | 국립청주박물관 |
지정번호 | 보물 제1629호 |
지정일 | 2010년 01월 04일 |
목차
정의
조선시대 효종, 현종, 장렬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가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를 하나로 묶은 첩(帖)이다
내용
숙명신한첩의 구성
『숙명신한첩』은 효종의 둘째 딸인 숙명공주가 궁궐에서 출가한 후 40여 년간 왕과 왕비, 대비 등과 주고받은 한글로 쓴 친필 문안편지를 모은 총 68편의 서첩이다. 이 중에는 효종 어셔 9편・현종 어셔 2편・인선왕후 어셔 53편・명성왕후 어셔 1편・숙명공주의 편지 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공주가 출궁한 사가였던 심익현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다가 故 김일근이 소장하던 것을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인수하여 현재 소장하고 있다. [1] 『숙명신한첩』은 1962년 故김일근 선생이 발견할 당시에 표지가 소실되어 있었고, 부분적으로 서첩 뒤편 하단부가 훼손되어 있다. 『숙휘신한첩』과 대조하여 볼 때 앞뒤가 빠졌을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수록된 편지는 모두 68편이나 서첩 뒤편에 빠진 부분이 있다면 먼저 발견된 『숙휘신한첩』의 내용으로 보아 ‘명성왕후 어셔’로 분류된 편지가 몇 편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숙명신한첩의 서예사적 가치
조선시대에 쓰여진 한글 편지는 대부분 필사자와 편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숙명신한첩』은 17세기 효종 대부터 현종 대까지 필사 시기가 분명하고 필적이 확실하다. 또한, 전후시기를 살펴보건대 現傳하는 왕후들의 언간 자료 중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이 편지들의 서체는 효종과 숙명공주의 정자체 2편, 반흘림체 1편, 흘림체 6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이를 통해 한글 궁체의 변천 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궁체가 왕실에서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글서예사를 파악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3]
숙명신한첩의 사회 배경과 역사사료적 가치
『숙명신한첩』이 쓰인 시기는 단순한 복상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의 정쟁의 시기였다.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대표되는 남인이 禮로써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실현 방법 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 논쟁이 성행했던 시기였기에 禮를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당시 禮學을 중시하였던 상황에서 예송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의 주인공인 효종·장렬왕후·인선왕후의 글씨가 『숙명신한첩』에 실려있다. 특히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편지가 많은데 내용은 일상생활의 안부이지만 궁중풍속이나 앞서 말한 정치사건 및 상황 등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4]
지식 관계망
주석
- ↑ 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6쪽.
- ↑ 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쪽.
- ↑ 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2쪽.
- ↑ 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8-10쪽.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국립청주박물관, 『조선 왕실의 한글 편지 숙명신한첩』, 국립청주박물관 2011.
- 황문환, 『조선시대 한글편지 판독자료집』, 역락 2013.
- 논문
- 정복동,「《신한첩》서의 심미 양식 고찰 : 《숙명신한첩》·《숙휘신한첩》을 중심으로」, 『서예학연구』23, 한국서예학회, 2013.
- 김연희, 「《숙휘공주신한첩》의 서체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웹자원
-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조선시대 한글편지,
『한국학자료센터』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6년 12월 27일. - "안순자. 조선 왕실의 한글편지", 『충청일보』, 2011년 7월 5일.
-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조선시대 한글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