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
왕사 (王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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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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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王師 |
정의
임금의 스승이 되었던 승려.[1]
내용
왕사제도는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채택하였으며,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왕사를 두게 된 까닭은 왕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측면 외에도 백성의 대부분이 불교를 신앙하였으므로 그들을 정치에 직접 참여시키지 못하는 대신에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고승을 왕의 스승으로 책봉함으로써 고려의 정치이념을 구현하려는 데 있었다.[2]
왕이 즉위하면 왕사와 국사를 책봉하였는데, 선왕(先王)대의 인물을 그대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입적하면 다시 새로운 승려를 임명하였다. 왕사와 국사의 선정 기준은 분명치 않으나, 대개 당대의 유력한 종단에서 고승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을 선정한 것으로 보이며, 당대 최고의 승직이자 명예직이었으므로 교종(敎宗)에서는 승통(僧統), 선종(禪宗)에서는 대선사(大禪師) 같은 최고의 승계를 가진 승려가 임명되었다.[3]
왕사는 고려 초기에는 선종(禪宗) 출신이 많이 선출되었고, 헌종에서 예종 때까지는 화엄종(華嚴宗)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인종 이후 강종 때까지는 선종과 천태종(天台宗)에서 많이 선출되었고, 그 후 후기에는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白蓮社) 출신의 고승들이 많이 책봉되었다.[4] 공민왕대부터 공양왕대까지는 화엄종 출신의 천희(千熙)를 국사로 임명하고 사굴산문(闍崛山門) 출신의 선현(禪顯)을 왕사에 임명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과 사굴산문에서 선정하였다. 고려시대의 마지막 왕사와 국사는 공양왕대에 각각 임명된 승려 찬영(粲英)과 혼수(混修)였는데, 태조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이들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말기에 선왕이 임명한 왕사와 국사가 입적한 뒤에야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390년(공양왕 2)에 왕사 찬영이 입적하고 1392년(태조 1) 7월에는 국사 혼수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해 10월에 자초(自超)를 왕사에 임명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천태종 승려 조구(祖丘)를 국사에 책봉하였다. 그 뒤 1395년(태조 4)에 조구가 입적하고 1405년에 자초가 입적한 뒤에는 국사와 왕사의 자리가 모두 비었음에도 더 이상 임명하지 않았다. 태종 연간에 불교 교단을 통폐합할 때 비로소 왕사·국사를 봉하는 칭호를 없앴다는 사헌부(司憲府)의 상소 내용으로 미루어, 왕이 왕사와 국사를 임명하는 제도는 태종대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5]
왕사를 선정하기 위하여, 왕은 최고를 법계를 가진 고승을 상부(相府)에 자문하거나 왕이 직접 고승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무신집권 기에는 무신 실권자가 선정하기도 하였다. 고승이 선정되면 먼저 칙서를 가진 대신을 사찰로 파견하여 왕사 책봉을 수락할 것을 청하는 서신지례(書紳之禮)를 가진다. 고승은 이를 세 번 사양하는 예인 삼반지례(三反之禮)를 갖추고, 왕도 간곡하게 세 번 청하는 예인 찬앙지정(讚仰之情)을 가진다. 고승은 사양하다가 사양표(辭讓表)를 그치고, 왕은 왕사의 의장(儀仗) 물품을 보내어 개경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고승은 하사받은 가사(袈裟) 및 장신구를 갖추고 하산례를 행한 후, 개경에 있는 대사찰에 부임하였다.[6]
책봉 의식은 봉은사(奉恩寺)와 광명사(廣明寺) 같은 큰 사찰에서 거행하였는데, 임명장인 관고(官誥)와 인장(印章)을 내려 주었으며 왕은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관고와 인장은 왕사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왕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때는 인장을 왕에게 돌려보냈고, 입적할 때는 인장을 봉함하여 시자(侍者)나 지방 관리를 통해 왕에게 전달하였다. 국가에서는 왕사가 만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산소(下山所)를 지정해 주었으며, 사찰에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왕사는 하산소에 내려가 입적할 때까지 다른 사찰로 전보(轉補)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하산소의 주지는 왕사의 문도들이 계승하는 경우가 많았다.[7]
고려말기의 왕사는 하산소가 지정되지 않거나 하산소가 아닌 다른 사찰에서 입적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 왕사는 하산소에서 입적하였다. 왕사가 입적하면 문도들이 유서와 행장(行狀)을 왕에게 바치며 부음을 전하였고, 왕은 시호(諡號)를 내리고 관리를 파견해 장례 절차를 돕도록 하였다. 왕사가 입적한 하산소에는 왕명으로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대개 비석의 뒷면[碑陰]에는 문도들의 명단을 나열하여 사찰이 후대에도 문도들로 계승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왕사의 연고지를 승격시키고, 그 부모를 추증하기도 하였다.[8]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시각자료
주석
- ↑ 김상현, "왕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왕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호선, "왕사(王師)"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왕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강호선, "왕사(王師)"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왕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강호선, "왕사(王師)"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호선, "왕사(王師)"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