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목차
정의
소혜왕후의 가문 청주한씨
소혜왕후의 아버지인 한확은 자신의 누이가 명나라 성조의 후궁이 되면서 명과의 외교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며 우의정에 오른다. 소혜왕후의 가문은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도 소혜왕후의 소생 자을산군이 조선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그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혜왕후의 가문은 명과 조선 두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면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1]
소혜왕후의 생애
계유정난과 성종의 즉위
소혜왕후는 1437년 한확과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여방의 딸 남양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조선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조선 덕종)과 혼인하였고 1454년에 월산대군을 낳았다. 다음해 계유정난으로 시아버지 수양대군(조선 세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한학이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고 귀국 하던 중 죽고, 1457년 남편 도원군이 죽었다. 세자 자리는 해양대군(예종)에게 가게 되고 해양대군은 1468년 예종으로 즉위한다. 아버지와 남편의 연이은 죽음 속에서도 소혜왕후는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한명회의 딸과 혼인시키는 등 그 세력을 구축해나간다. 결국 예종이 즉위한지 14개월 만에 죽고 자신의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게된다. 12-16
=수렴청정과 며느리 윤씨 폐출
성종이 즉위하자 소혜왕후는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추천으로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인수대비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후 손자 연산군이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로 칭호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연산군의 어머니, 며느리 윤씨를 폐비시켰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원망을 받게 된다.16-17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것을 알고 박해(갑자사화)를 가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소혜왕후가 꾸집으니 연산군이 머리로 들이받았다고 한다. 그 후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2]
궁중 여성 교육서 《내훈》의 편찬
내용
주석
- ↑ 김희연, 「소혜왕후의 《내훈》저술과 여성교육」,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9-12쪽.
- ↑ 최완기,
「소혜왕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