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一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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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일연 |
한자 |
一然 |
생몰년 |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
시호 |
보각(普覺) |
호 |
무극(無極), 목암(睦庵) |
법호 |
견명(見明), 일연(一然) |
탑호 |
정조(靜照) |
자 |
회연(晦然), 일연(一然) |
성씨 |
김씨 |
본관 |
경주(慶州) |
출신지 |
경상북도 경산 |
승탑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
승탑비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일연은 1206년(희종 2)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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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존의 이름은 견명(見明)이며, 자는 회연(晦然)이나 뒤에 이름을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속성은 김씨이고, 경주 장산군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언필(彦弼)인데, 벼슬하지 않았으나 국존으로 인해 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낙랑군부인()에 봉해졌다. 일찍이 어머니가 집에 해가 들어와 그 빛이 사흘 밤 동안 배를 비춘 꿈을 꾸고 이로 말미암아 임신하여 태화() 병인년() 6월 신유일()에 낳았다. 나면서부터 걸출하여 언행과 외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넉넉한 몸매에 말수가 적었고 소와 같이 성실하고 호랑이와 같이 예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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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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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1214년(고종 1) 해양(海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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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어 9세 때에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로 가서 의탁하여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함이 비길 자가 없었다. 때로 밤이 새도록 정좌하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흥정(興定) 기묘년(己卯年)에 진전사(陳田寺)의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 나아가 삭발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찰을 다녔는데 명성이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이 추대하여 구산(九山) 사선(四選)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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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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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일연은 1227년(고종 14) 승과(僧科)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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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년(丁亥年)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包山)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마음을 선관(禪觀)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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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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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1236년(고종 23)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거처할 곳을 찾다가 무주암(無住庵)에 머물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계시를 받고, 1237년 무주암으로 옮겼다. 거기서 '현상계(現象界)가 줄어들지도 않고 본체계(本體界)가 늘어나지도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는 말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다가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246년(고종 33)에 선사(禪師)가 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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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丙申年) 가을에 병란이 있어 스님께서 피할 곳을 찾고자 하여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송하면서 감응을 기원하였더니, 홀연히 벽 사이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無住)에 머물러라"라고 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다시 이 포산 묘문암(妙門庵)에 머물렀다. 암자 북쪽에 무주(無住)라는 난야(蘭若)가 있었다. 대사가 곧 이전의 문수보살의 기별을 깨닫고 그 암자에 머물면서 항상 '중생계가 줄지 않고, 불계(佛界)가 늘지 않는다'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활짝 의문이 풀리면서 크게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환몽(幻夢)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에 작은 터럭만큼의 장애도 없음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제수받고, 병오년(丙午年)에 선사(禪師)를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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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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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1249년(고종 36) 정안(鄭晏)이 세운 남해 정림사(定林寺)의 주지로 취임하였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고종 43) 윤산(輪山)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를 편찬하였고, 1259년(고종 46)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260년(원종 1)에는 『중편조동오위』의 서문을 썼다. 1261년(원종 2)에 왕명을 받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의 법통을 계승하였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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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己酉年)에 상국(相國)인 정안(鄭晏)이 남해(南海)의 사제(私第)를 희사하여 정림사(定林寺)라는 절을 만들고 대사를 주지로 모셨다. 기미년(己未年)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중통(中統) 신유년(辛酉年)에 왕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서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면서 개당(開堂)하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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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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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1264년(원종 5)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원종 9)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주관하였다.[7] 1274년(원종 15) 비슬산에 있는 인홍사(仁弘社)를 확대 중건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원종은 절 이름을 인흥사(仁興寺)로 바꾸고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또한 일연은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고 불일사(佛日寺)로 이름을 바꾼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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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至元) 원년(元年) 가을에 이르러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번 청하여 오어사(吾魚社)에 머물렀다. 얼마 후에 인홍사(仁弘社) 주지인 만회(萬恢)가 대사에게 주지의 자리를 사양하니 배우고자 하는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무진년(戊辰年) 여름에 왕명에 따라 선종과 교종의 명망있는 승려 100명을 모아 대장낙성회(大藏落成法會)를 운해사(雲海寺)에 개설하고, 대사를 주맹(主盟)으로 모셨다. 낮에는 불경을 읽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하니,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대사가 모두 물 프르듯이 자세히 풀어주고 정미로운 뜻이 신통한 경지에 들어, 공경하고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사가 인홍사에 11년간 머물렀는데, 절을 지은 것이 이미 오래되어 전각이 모두 낡고, 또 지대가 낮고 좁았으므로 중수(重修)하거나 새로 지었다. 이에 조정에 아뢰니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다. 또 포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이름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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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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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283년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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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즉위한지 4년 정축(丁丑)에 왕명을 내려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하니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왕이 날로 깊이 마음을 기울이더니 시를 부쳐 이르기를, "비밀리에 전함에 어찌 반드시 구의(摳衣)를 고치리오. 금지(金地)에 만나 부름이 또한 기이하도다. 그대를 대궐 아래에 맞아 들이고자 하는데 대사는 어찌 백운(白雲)의 가지에 길이 애태우는가?"라고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여름에 일본 정벌로 말미암아 경주로 행차하여 명을 내려 대사를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였다. 대사가 이르자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배로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대사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취하여 운을 찍고 제압(題押)하여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가을 장작윤 김군(金頵)을 근시장(近侍將)으로 삼아 조서(詔書)를 보내어 맞으니 대궐에 이르렀다. 대전(大殿)으로 청하여 선(禪)을 설법하니 기쁨이 용안(龍顔)에 넘쳤으며, 유사(有司)에 칙명을 내려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院)에 들어가던 날 밤에 어떤 사람이 방장(方丈) 밖에 서서 "잘 오셨습니다"라고 세 번 말하였는데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몸소 찾아와 법요(法要)를 자문하였다.
다음해 봄에 왕이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모두 불교의 덕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으셨고 덕이 더욱 큰 이를 국사로 삼으셨는데, 과인만이 유독 없으면 옳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니, 어찌 과인만이 홀로 인자한 은택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마땅히 한 나라와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승지(右承旨)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어 왕명을 받들어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사는 표문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궁궐로 맞아들여 왕이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다.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한 거은 원의 국사라는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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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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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년(충렬왕 9)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허락하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게 명령을 내려 호위하게 했다. 1284년(충렬왕 10)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무를 곳으로 삼게 하고 100여 경(頃)의 토지를 하사했다. 인각사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일연은 두 번에 걸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사찰의 성대함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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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평소 서울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어머니가 연로하여 옛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고 물러갈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왕이 거듭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허락하였다. 근시좌랑(近侍佐郞) 황수명(黃守命)에 명하여 호위하여 가게 하여 산을 내려가 어머니를 뵙게 하니 조야(朝野)가 드문 효심을 찬탄하였다. 다음 해에 어머니가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해에 조정에서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삼고, 근시 김용검(金龍釰)에게 명하여 절을 수리하게 하고, 또 토지 100여 경(頃)을 바쳐 상주(常住)하도록 하였다. 대사가 인각사에 들어가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여니 총림의 성황이 근고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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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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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1289년(충렬왕 15) 7월 제자들과 선문답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가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으며, 향년은 84세, 법랍은 71세였다. 입적하던 해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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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己丑年)년 6월에 병세가 있어 7월 7일에 이르러 손수 왕에게 올리는 글을 쓰고, 또 시자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상국(相國) 염승익에게 보내어 영원히 떠남을 알리도록 하였다. 여러 선로(禪老)들과 더불어 날이 저물도록 문답하였다. 이날 밤 한 자 둘레만한 큰 별이 방장실 뒤에 떨어졌다. 다음 날 을유(乙酉)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앉아 대중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떠나려 하는데, 꺼리는 날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아니라고 대답하니 좋다고 하였다. 승려에게 법고(法鼓)를 치게 하고 대사는 선법당(善法堂) 앞에 이르러 선상(禪床)에 앉았다. 인보(印寶)를 봉하고 장선별감(掌選別監) 김성고(金成固)에게 명하여 거듭 봉하기를 마치고 이르기를, "사신이 와서 노승의 말후사(末後事)를 보이리라"고 하였다. 어떤 승려가 나와 묻기를, "석존이 학림(鶴林)에서 열반에 드셨고 화상은 인령(麟嶺)에서 입적하시니, 서로의 차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주장자를 들었다가 한 번 내리치고, "차이가 얼마인가?"라고 말하였다. 승려가 나아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현재와 옛 것이 상응하여 떨어짐이 없이 분명히 눈앞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대사가 또 주장자를 내리치고 이르기를, "분명히 눈앞에 있느니라"라고 하니, 승려가 이르기를, "세 뿔을 가진 기린이 바다 속에 들어가니 부질없이 남은 조각달이 물결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훗날 돌아오면 다시 상인과 더불어 거듭 한바탕 희롱하리라"라고 하였따. 또 어떤 승려가 묻기를, "화상께서 백년 후에 돌아가면 모름지기 소용될 물건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다만 이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승려가 나아가 이르기를, "거듭 군왕(君王)과 더불어 무봉탑(無縫塔)을 만듦에 무슨 방해가 있겠습니까?"라 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어떤 곳을 가고 오겠는가?"라고 하였다. 승려가 나아가 이르기를, "모름지기 물음이 지나쳤습니까?"라 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을 알면 곧 그치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또 어떤 승려가 묻기를, "화상이 세상에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몸을 보기를 몸이 없는 것과 같이 하시니, 세상에 머물러 대법륜(大法輪)을 굴리는 것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사가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나 불사(佛事)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답이 끝난 다음에 대사가 이르기를, "여러 선덕(禪德)은 날마다 알려라. 아프고 가려운 것과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은 것이 모호하여 가릴 수 없으리라"라고 하고 이에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말하기를, "이것이 아픈가?" 하고, 또 한 번 내리치고, "이것은 아프지 않은가?" 하며, 또 한 번 내리치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아픈가, 아프지 않은가? 시험 삼아 자세히 살펴보라"라고 하고 자리에서 내려와 방장으로 돌아갔다. 또 작은 선상에 앉아서 담소를 평소와 같이 하더니 잠시 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오색 빛이 방장실 뒤쪽에서 일어났는데, 곧기가 당간과 같고, 그 끝의 이글거리는 빛은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그 위에는 흰 구름이 일산(日傘)처럼 덮고 있다가 하늘을 향해 사라져갔다. 때는 가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도 얼굴 모습이 곱고 희고 지체는 맑고 윤택하여, 굽고 폄에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와 보는 자가 마치 담에 늘어선 듯하였다. 정해일(丁亥日)에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선실(禪室)에 두었다. 문인이 유언장과 인보(印寶)를 갖고 역마를 타고 전하여 아뢰니, 왕이 매우 슬퍼하며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를 영척(令倜)을 보내어 마무리하는 예를 다했다. 또 안렴사(按廉使)에게 명하여 장례를 감호하게 하였다. 이어 제서(制書)를 내려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조(靜照)라 하였다. 10월 신유일(辛酉日)에 탑을 절의 동쪽 산등성이에 세웠다. 세수는 84세이고, 법랍이 7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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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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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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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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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
일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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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년 |
일연은 해양(海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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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년 |
일연은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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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년 |
일연은 승과(僧科)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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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년 |
일연은 몽고가 침입하자, 무주암(無住庵)에 머물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계시를 받고, 무주암에 주석하였다.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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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6년 |
일연은 선사(禪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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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9년 |
일연은 남해 정림사(定林寺)에 주석하면서,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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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 |
일연은 윤산(輪山)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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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년 |
일연은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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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년 |
일연은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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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년 |
일연은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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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8년 |
일연은 조정에서 베푼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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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
일연은 비슬산에 있는 인홍사(仁弘社)를 확대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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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7-1281년 |
일연은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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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년 |
일연은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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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2년 |
일연은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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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년 |
일연은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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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년 |
일연은 인각사(麟角寺)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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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9년 |
일연은 향년 84세, 법랍 71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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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군위 인각사 일연선사생애관 앞에 세워진 일연찬가비(시인 고은作)
영상
주석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 ↑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