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
정의
유희(柳僖1773~1837)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개요
유히의 생애
유희(柳僖1773~1837)는 영조 말기 경기도 용인군 막현면 마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중, 호는 방편자, 남악, 서파였다. 그의 부친은 충청도 목천현감을 지낸 진주유씨 유한규(柳漢奎)이며 모친은 태종의 11대손인 전주이씨 이창직(李昌㮨)의 딸 사주당(師朱堂)이다이다. 어릴 때부터 한문에 능했으며 18세에 과거 초시에 합격했으나 두메에 들어가 20년 동안 과거를 보지 않았다. 37세부터는 충청도 단양으로 이향하였다가 47세에는 선산이 있는 용인으로 다시 환향하였다. 그의 모친인 사주당은 당대의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 임연 이양연(臨淵 李亮淵)과 같은 학자, 문신이 찾아갈 만큼 학식이 고명하고 저서가 많았다. 그러나 임종 직전 '여자의 글은 용납되지 않고 비웃음만 사기 쉬우니 다 태워버려라'라 하고는 태교신기만을 남기게 하였다. 유희는 1829년 57세의 나이로 회시에 합격했으나 1837년 2월 용인 남악 신사에서 65세의 나이로 부인 안동권씨와 3남 1녀의 자식을 남긴 채 서거하였다. [1]
유희의 학문과 편찬활동
유희는 양명학에서 영향을 받은 강화학파의 학자 정동유의 제자이자 언어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실재로 유희가 남긴 언문지, 물명고 등은 조선의 자학, 언어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서적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경학에 능하였으며 역대정삭교를 저술하는 등 경학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평생 연구한 초고가 100여 권이나 되는데 그의 연구서를 집대성한 것이 문통이다. 그 중에 19권인 언문지의 태교신기음의가 잔존하고 유실되었던 문명고도 재발견되었다. 그의 모친이 남긴 태교신기에 언해를 붙이고 石泉의 서문과 ?氏의 발문을 붙여 출간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태교신기언해이다. 뿐만 아니라 量田議, 律樂類說, 歷象志 등의 저술은 문자로써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에 비추어 실증해야 하는 것이라 고증하려는 학자의 깊은 蘊審이 보인다고 평가되었다. [2]
주석
- ↑ 김민주, 「柳僖 선생의 生涯와 學問」, 『10월의 문화인물』, 국립국어연구원, 2000, 2-5쪽
- ↑ 김민주, 「柳僖 선생의 生涯와 學問」, 『10월의 문화인물』, 국립국어연구원, 2000, 5-6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한국어문교육연구회, 『柳僖의 生涯와 國語學 資料集』, 한국어문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