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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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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5월 19일 (금) 15:17 판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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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驪州 神勒寺)
대표명칭 여주 신륵사
한자 驪州 神勒寺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문화재 지정일 1974년 12월 28일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경내문화재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여주 신륵사 조사당,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1]


내용

역사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전해져내려오는 창건 설화가 있다.

Quote-left.png 어느날 원효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는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신륵사의 역사, 신륵사 홈페이지


신륵사는 1376년(고려 우왕 2) 나옹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2] 이 당시 신륵사는 200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3]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신륵사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조선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4]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이후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5]

사찰 명칭의 유래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①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미(나옹)이 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②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6]

지리

신륵사와 관련한 설화에는 용이 많이 등장한다.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그러한 설화들은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륵사는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도 추론해볼 수 있다. 조선 초의 학승 신미의 제자였던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반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7]

관련 이야기

양주 회암사에 머물던 나옹이 왕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곳은 밀양 형원사(瑩源寺)였는데 이에 얽힌 사연이 기이하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는데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산문을 닫아도 막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급기야 나옹에게 밀양땅 형원사로 한시 바삐 떠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나옹은 이미 병이 깊었는데 왕명이 떨어졌으니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나옹은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신륵사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였고, 이곳은 선사의 열반지가 되었다. 그때 하늘에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스러져가던 신륵사를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8]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나옹 A는 B를 위한 비이다
원효 여주 신륵사 A는 B와 관련있다
조선 세종 여주 신륵사 A는 B와 관련있다
여주 영릉 여주 신륵사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67년 나옹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1469년 왕실에서 여주 신륵사여주 영릉의 원찰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1474년 여주 신륵사가 보은사(報恩寺)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시각자료

영상

  • PJH Films from KOREA, "[Behoder DS1+GH4 경기 여주 신륵사 Silleuksa Temple, YEOJU, KOREA 2016]", YouTube, 게시일: 2016년 6월 20일.

주석

  1. 김위석, "신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신륵사", 『두산백과』online.
  4. 김위석, "신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
  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신륵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7. "신륵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8.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최완수, 『명찰 순례』, 대원사, 1994.
  • 김위석, "신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륵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