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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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일찍부터 뛰어난 문재(文才)로 주목받았으나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장기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 유배기간 동안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

제자 양성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신분과 출신, 종교를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 가르쳤다. 다산초당으로 가기 전 8년 동안 강진읍에서 머무를 때에는 직접 『제경』, 『아학편』 등의 초학 교재를 만들었으며, 읍내의 아전 집 아이들을 모아 배움에 귀천이 없음을 설파하였다. 또한 다신계절목에서 언급되는 전등계혜장의 제자인 수룡철경, 의순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정약용을 스승과 같이 섬겼다.
정약용이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곳은 역시 다산초당이다. 이청, 이강회, 의순 등의 제자들이 힘써 배우고 스승을 도왔으며, 정약용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산학단을 이루어 학문을 닦고 정약용의 아들이자 제자인 정학연을 통해 서울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불교와의 교류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유불을 가리지 않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가졌다. 당시 강진에는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를 비롯한 명문 양반가 뿐 아니라 백련사(만덕사)와 대둔사 등이 위치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백련사의 주지인 혜장과 정약용은 깊은 학문적 교류 뿐 아니라 차(茶)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로도 알려져 있다. 정약용이 기거하던 다산초당 뒤편에는 백련사통하는 길이 바로 이어져 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제자들 외에 강진의 승려들에게도 제다법을 가르쳐 차 보급에 앞장섰다고 한다.

저술활동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백성들이 고통받는 조선의 현실을 통감하고‘일표이서’로 대표되는 경세학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세유표』에서는 거대한 국가개혁론을 제시하였고, 『목민심서』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기준과 사무를 제시하며 “자신을 다스려라”, “공무에 봉사하라”, “백성을 사랑하라”는 세 가지의 자세를 밝혔으며, 『흠흠신서』에서는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하고 보호해야 하는 관료의 역할을 강조하여 제시하였다.[1] 또한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백운동도」「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합첩한 『백운첩(白雲帖)』을 남기기도 하였다.[2]

가족과의 교류

정약용은 유배 생활을 하면서 18년이 넘도록 가족과 만나지 못했다.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810년 부인 홍혜완이 보낸 치마에 두 아들 정학연, 정학유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서첩인 하피첩, 1813년 시집간 딸의 ‘화목한 가정’을 기원하며 그린 매화병제도 등이 있다.

시각자료

사진

영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약용 의순 A는 B의 스승이다
정약용 이강회 A는 B의 스승이다
정약용 이청 A는 B의 스승이다
정약용 백운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약용 목민심서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약용 흠흠신서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약용 경세유표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약용 하피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1810
정약용 매화병제도 A는 B를 저술하였다 1813
정학연 정약용 A는 B의 아버지이다
정학유 정약용 A는 B의 아버지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28년 정약용이 다신전을 저술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4.7406953 126.7047464 설록다원강진은 정약용과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 "정약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주석

  1. 유배지의 제자들,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2.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