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철
수철(秀澈)() | |
대표명칭 | 수철(秀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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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 817년(헌덕왕 9)-893년(진성여왕 7) |
시호 | 수철(秀澈) |
탑호 | 능가보월(楞加寶月) |
성씨 | 김씨(金氏) |
승탑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
승탑비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수철(秀澈)은 815년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가 소판(蘇判)[1]을 지낸 진골(眞骨) 가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에 이르러서는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증조의 위(位)는 소판으로 혈족이 진골로 빼어나 경사로움이 법신(法身)에까지 넉넉했고, 조부는 일신(日新)이고 부친은 수정(修靜)인데 벼슬하려 하지 않고 대대로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전해주어 가문이 온전하였으니 세상을 피하여 보전한 맑은 것이 있었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수철(秀澈)은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찍이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입도(入道)함에 있어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아보니 헛된 꿈임을 깨달아, 눈먼 거북이 판자조각 만나는 듯한 인연을 언뜻 듣고 부처를 보자 지체하지 않았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출가수행
수철(秀澈)은 15세경에 연허(緣虛) 율사에게 출가하고[2], 천종(天縱) 대덕에게 수학하였다.
15살 남짓에 불법을 배우고자 하여 연허율사(緣虛律師)에게서 머리를 깎고 천종대덕(天縱大德)에게 경전을 배웠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이후 수철(秀澈)은 동원경(東原京) 복천사(福泉寺)에서 윤법(潤法) 대덕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동원경(東原京)[3] 복천사(福泉寺)[4]에 이르러 윤법대덕(潤法大德)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활동
수철은 실상산문을 개창한 승려인 홍척(洪陟)의 제자가 되었다.[5]
또한 수철은 명산을 찾아다니며 선(禪)을 닦는 여가에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였다.[6]
이미 이치를 풀어냈으니 (정해진) 거처가 있겠는가. 이름난 산과 경치 좋은 곳의 탑을 일삼아 예배하였으며 … 선(禪)의 동산에서 꽃잎을 드날리고 화엄을 만나 향기를 피어 올렸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명산승지의 순례를 마친 이후 수철은 지리산 지실사(知實寺)를 사축(私築)하고 가르침을 펼쳤으며[7], 정법대덕(正法大德) 홍□(弘□), 승정(僧正) 순□(順□), 종자선사(宗子禪師)와 같은 당대의 뛰어난 승려들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수철은 신라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먼저 수철은 태사(太師)로 추증된 경문왕(景文王, 재위:861∼875)에 의해 경주의 팔각당(八角堂)으로 초빙되어 선교(敎禪)의 동이(同異)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 이에 수철은 경문왕에게 선교병립적(禪敎竝立的)인 방향을 제시해주었고, 경문왕은 그에 대한 답으로 법호를 내려주었다.[8]
수철은 헌강왕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太傅를 추증받은 憲康大王께서 왕위를 이어 자주 서신을 보내시므로 거동을 옮겨 …….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수철은 혜위법사와 천○법대덕 등의 승려들과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철은 진성왕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眞聖王께서 定康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힘들어 하다가 돌아가자 이에 앞의 허물을 따라 …… 어찌 누추한 곳이라 하겠는가. 본래 …… 물들지 않음을 얻어 그윽한 도리가 끝까지 맑고 한가하니 일평생의 큰 인연이 임금의 스승이 되는데 한점의 흠도 없었다.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입적
관련항목
주석
- ↑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 중의 제3등 관계로,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었으며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紫色)이었다. "잡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 비문에서는 이 시기를 지학(志學)이라고 표현하였다.("年餘志學學佛是圖落采於緣虛律師") 따라서 수철은 대략 829년 경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 ↑ 김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처용가에서 경주를 동경이라 하여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 고려시대의 동원경 용례를 참고하여 명주로 보기도 함.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6쪽 각주33번.
- ↑ 官壇이 있어 郎空大師도 여기서 구족계를 받음(「太子師 郎空大師塔碑」). 구체적 위치는 미상이지만 명주 관내에 있었다고 보기도 함.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6쪽 각주34번.
- ↑ 수철이 처음으로 홍척을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비문의 해석에 따라 ①설악산, ②실상사, ③경주로 보는 견해가 있다. ①설악산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선정국사"라는 홍척의 호칭으로 해석하여, 수철은 설악산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②실상사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사라는 장소로 해석하여 수철은 실상사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③경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선종,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음기와 중건에 대하여」, 『불교문화연구』제11책,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9.로, 비문에서 언급된 "□□□師"(8행 17~20열)를 홍척을 가리키는 "證覺□師"로 판독하여, 수철은 홍척이 도읍인 경주에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고 주장한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지실사(知實寺)를 지금의 실상사(實相寺)로 비정하고, 수철에 의해 실상사의 사역이 확장되었다는 의미에서 사축(私築)을 해석하기도 한다.(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 정동락, 「수철화상(815~893)과 신라왕실」, 『한국고대사탐구』제3책,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 ↑ 정동락, 「수철화상(815~893)과 신라왕실」, 『한국고대사탐구』제3책,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