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왕지인
부여에서는 일찍부터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인을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역시 국인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조예군은 한의 식민지배와 연관되어 봉군된 부조출신 예맥족 군장임을 보여 준다. 무덤양식도 전통적인 토광묘에 전한의 목곽묘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장자가 한과 연관된 토착 지배층일 가능성을 보여 준다. 한식 수레부속과 토착적인 세형동검 및 토기의 반출도 그같은 가능성을 높여 준다.
‘부조’는 『한서(漢書)』 지리지에 낙랑군의 현의 하나로 나오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는 옥저(沃沮)로 나온다. 부조는 기원전 108년과 107년의 한군현 설치시 현도군에 속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임둔군의 속현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전 82년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치하고 현도군과 낙랑군에 합쳤는데 그 때에 현도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현도군이 맥족들의 공격으로 중국방향으로 옮겨진 기원전 76년경에는 부조는 낙랑군에 소속되었다. 그 뒤, 곧 부조 등 현도군의 지배를 받던 영동7현은 낙랑동부도위의 설치와 함께 그 지배를 받았다. 부조예군은 도위가 설치되어 식민통치가 강화되면서 토착지에서 이주를 당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이주된 것으로 보인다.
부조예군은 낙랑군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무덤은 고향에 만들어지지 않고 조선현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토착세력 불식을 위한 군현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인(公印)은 개인의 소유가 아닌 만큼 한대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부장해 피장자의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는 모조 ‘夫租長印’을 부장하고 있는 같은 정백동에 위치한 고상현(高常賢)묘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부조예군’인은 실인으로 무덤에 부장되어 있다. 이것은 토착세력과 단절된 부조예군의 지위가 허구화되어 그의 죽음과 더불어 도장을 회수할 가치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부조예군’의 종족명 ‘예’ 는 『사기(史記)』에서는 ‘穢’로 『한서』에서는 ‘穢’와 ‘薉’로 쓰이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에는 ‘濊’로 쓰이고 있어 시기별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조예군이 기원전 1세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강해준다.
『한서』 무제기(武帝紀)에는 예군남려(薉君南閭) 세력에 창해군이 설치되었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 있음을 전하고 있어 부조예군과의 관계가 문제된다. 그러나 ‘부조’라는 별도의 지역명을 관칭하고 있는 만큼 이들과의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의 변방 종족 지배층에 대한 봉군이나 인장의 사여도 결코 적지 않은 만큼 예군남여와 ‘예왕지인’의 관련성도 단정적으로 볼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