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계
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광계는 1604년에 진사(進士)가 된 뒤,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에 임명되었다. 이후 1600년에 중국에 와서 포교에 종사하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를 만나 교류하였다. 이들에게 천문과 수학을 배우고, 『기하원본』 등을 번역하는 등 과학기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숭정(崇禎) 연간에 예부(禮部) 상서(尙書) 등에 임명되며 승진하였다. 후금(後金)이 강해지자 홍이포(紅夷砲) 등을 제작하였고, 군사훈련을 하며 명의 국방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619년에 명이 심하전투(사르후[薩爾滸]전투)에서 패한 후, 요동을 둘러싸고 명과 후금·조선의 사이에 복잡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강홍립의 투항, 명의 징병 요구에 대한 조선의 불응, 조선과 후금의 사신 왕래 등으로, 명과 조선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여기에 불안함을 느낀 명은 조선에 대한 여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광계는 1619년 6월 28일에 조선과 연계하여 후금을 경계해야 한다는 ‘조선감호론(朝鮮監護論)’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서 설득시키고 돌아오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력제(萬曆帝)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그해 9월에 서광계를 하남도감찰어사(河南道監察御史)로 승진시켜 병사들의 훈련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사은사(謝恩使) 겸 천추사(千秋使)로 파견된 이홍주(李弘冑)는 8월 2일에 북경에 도착한 후, 서광계가 조선에 가려 했었다는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홍주 등은 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실체가 ‘조선감호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홍주는 돌아오는 길에 조정에 관련 내용을 요약하여 보냈다. 같은 해 10월에 조선 조정에서 이 정보를 입수한 후, 곧바로 회의를 열어 명에 사신을 보내 이 내용을 따져서 억울함을 밝히기로 결정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0월 3일).
비록 서광계의 ‘조선감호론’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조선 조정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후에도 조선 조정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논의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0월 4일)(『광해군일기』 11년 10월 13일)(『광해군일기』 11년 11월 12일)(『광해군일기』 11년 12월 29일)(『광해군일기』 12년 1월 18일).
서광계는 유교에도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등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1600년에 예수회 선교사를 만나 과학·수학·천문·무기 등 서양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마테오 리치([利瑪竇], Matteo Ricci)와 함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번역하였고, 서양인이 만든 역법서를 참고하여 『숭정역서(崇禎曆書)』를 간행하였다. 그는 경학에도 능통하여 『시경(詩經)』을 바탕으로 『모시육첩강의(毛詩六帖講義)』, 『시경육첩중정(詩經六帖重訂)』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은퇴 후, 고향에 돌아와서 고대 중국의 농업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저술하였다.
서광계의 묘소는 현재의 중국 상해시(上海市) 서휘구(徐彙區) 동단로(南丹路) 광계공원(光啟公園) 내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