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
특별기고: 지눌이 요세에게 |
요세(了世) | |
대표명칭 | 요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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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了世 |
시호 | 원묘(圓妙) |
호 | 법운(法雲), 법유자(法遊子) |
탑호 | 중진(中眞) |
자 | 안빈(安貧) |
성씨 | 서씨(徐氏)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 |
정의
고려 후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속성은 서씨(徐氏).본은 이천서씨 자는 안빈(安貧). 법명은 요세(了世). 경상남도 합천 출신. 아버지는 신번현(新繁縣)의 호장을 지낸 필중(必中), 어머니는 서씨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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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련사 원묘국사비", 세부정보, 금석문찾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
출가수행
1174년(명종 4) 합천 천락사(天樂寺)로 출가하여 균정(均定)을 은사로 삼아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닦았다. 1185년 승과에 합격하였고, 그 뒤 천태종지(天台宗旨)에 뜻을 둔지 몇 년 만에 높은 덕망을 얻었다.[2]
12세에 강양(江陽, 지금의 경남 합천군(陜川郡)) 천락사(天樂寺)의 승려 균정(均定)에게 가서 사미(沙彌, 머리를 깎고 처음 출가한 승려.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가 되어야 함)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교관(天台敎觀)를 알게 되었다. 이때 학사 임종비(林宗庇)가 강양 군수였는데, 한 번 보고는 그릇이 될 만함을 알아 보고 불법이 믿을 만한 자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22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불교의 종지에 뜻을 오로지하고, 두루 강석(講席)에 참가하였다. 몇 년이 되디 않아 지귀(指歸, 이치가 돌아갈 바 곧 중요한 이치)를 확실히 깨달아, 벌써 일가(一家)의 높은 명망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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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거조사(居祖寺)에서 지눌의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을 때, 함께 지내면서 정혜사(定慧社)의 선(禪) 수행법을 익혔다. 그 뒤 남원 귀정사(歸正寺)에서 천태의 『묘종(妙宗)』을 강의하였으며, 화장암(華長庵)에서 선을 참구하였다.[3]
조계(曺溪)의 목우자(牧牛子,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가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 모임의 불갑(佛岬)에 있다가 그 소문을 듣고 속으로 뜻이 통하여, 대사에게 게송을 보내 선법(禪法)을 닦으라고 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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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년(희종 4) 영암 월생산(月生山)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하고 있을 때 천태종 중흥의 사명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 일은 그가 지눌의 조계선(曹溪禪)에서 천태종으로 복귀하는 사상의 전환점이 되는 동시에, 뒷날 전개한 백련결사운동의 근본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4]
태화(泰和) 8년 무진년(희종 4, 1208) 봄에 월생산(月生山) 약사난야(藥師蘭若, 난야는 본래 작은 절을 말함)에 머물고 있었다. 물은 맑고 산은 빼어난데 절의 당우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는 힘써 수리해 놓았다. 어느 때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정신을 도야하고 미묘한 이치를 관찰하면서 문득 생각하기를, “만약에 천태(天台)의 미묘한 지해를 얻지 못하면 영명연수(永明延壽)의 백 20가지 병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이로 인해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다. 『묘종(妙宗)』을 강설하다가, “이 마음이 부처가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저절로 파안대소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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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년(고종 3) 만덕산에 800여 칸의 절이 완성되자 이곳에서 천태종 중흥에 힘을 기울였다. 1221년 대방(帶方: 전라북도 남원) 태수(太守)인 복장한(卜章漢)이 관내로 올 것을 요청하여, 대방관 내의 백련산(白蓮山)으로 옮겨 몇 년을 지내고, 1223년 최표 등의 요청으로 만덕사로 돌아왔다.[5]
탐진현(耽津縣, 지금의 전남 강진(康津))에 신사(信士, 불교 신도) 최표(崔彪)ㆍ최홍(崔弘)ㆍ이인천(李仁闡) 등이 대사를 찾아와 뵙고 말했다. “지금 승려들은 점점 많이 모여 산사가 심히 협소한데, 우리 고을 남해의 산 옆에 만덕사(萬德寺) 옛터가 맑고 빼어나 절을 지을 만합니다. 어찌 가서 시도하지 않으십니까.”
대사가 가서 보고 허락하여 대안(大安) 3년 신미년(희종 7, 1211)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제자 원형(元螢)ㆍ지담(之湛)ㆍ법안(法安) 등을 시켜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집 80여 간을 지었다. 정우(貞祐) 4년(고종 3, 1216) 가을에 준공이 되어 법회를 열고 낙성식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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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되던 1232년 처음으로 만덕사에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전통적인 법화삼매참회(法華三昧懺悔)를 닦았다. 결사운동은 보현도량의 개설을 계기로 하여 체계가 정비되었고, 백련사(白蓮社)라는 결사의 명칭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백련결사운동의 구체적인 실천 내용은 천태지관(天台止觀)·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정토왕생(淨土往生)이었다.[6]
임진년(고종 19, 1232) 여름 4월 8일에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하기를 구하되, 오로지 천태삼매의(天台三昧儀)에 따라 하였다. 오랫동안 법화참회(法華懺悔)를 수행하고 주변에 권하여 발심(發心)시켜 이 경을 외운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사부대중(四衆)의 요청을 받아 교화시켜 인연을 지어준 지 30년에 묘수(妙手)로 제자를 만든 것이 38명이나 되었으며, 절이나 난야를 지은 것이 다섯 곳이고, 왕공대인(王公大人, 왕실과 조정의 주요 인사)과 목백현재(牧伯縣宰, 여러 지방 고을의 수령)들과 같은 신분이 높고 낮은 사부대중들이 이름을 써서 결사(結社)에 들어온 자들이 3백여 명이나 되었다. | ||
출처: "백련사 원묘국사비", 세부정보, 금석문찾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
입적
1245년 4월에 제자인 천인(天因)에게 백련사를 맡기고, 같은 해 7월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원묘국사(圓妙國師), 탑명은 중진(中眞)이다.[7]
7일 축시(丑時,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에 이르러 시자(侍者, 고승을 시봉하면서 모시는 승려)를 시켜 경쇠를 쳐서 여러 사람을 모으게 하고, 물을 가져다 세수를 하고 법복을 입고 법좌에 올라 가부좌하고서 서향하여 앉아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50년 동안 산 속에 썩은 이 물건이 오늘 떠나갑니다. 각자 노력하고 법을 위해 힘쓰시오” 하였다. 천인이 묻기를, “세상을 떠날 때 선정(禪定)에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생각을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도가 나타나나니.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며,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어서, 감응(感應)하여 도와 오고가는 것이지 실상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생각을 거두고 고요한 것이 선정(禪定)에 든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이미 입적하였다. 향년 83세이고 승랍(僧臘, 출가한 이후의 나이)은 70년이었다. 얼굴 빛이 맑고 희어 보통 사람과는 달랐으며, 손과 발이 부드럽고, 머리 정수리가 오래도록 따뜻하였다. | ||
출처: "백련사 원묘국사비", 세부정보, 금석문찾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
지식 관계망
-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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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정 | 요세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요세 | 영천 거조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요세 | 남원 귀정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요세 | 백련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지눌 | 요세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요세 | 천인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주석
- ↑ 서윤길, "요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서윤길, "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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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