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우
1804년(순조4)~1879년(고종16).
자 원직(元直). 호 운재(耘齋). 귀천(龜川) 서성렬(徐成烈)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함.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
공은 어려서 총명하였고 초목(樵牧)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음. 6세 때에 아버지 성렬이 사마시에 입격하고 문희연(聞喜宴)을 여는 날에, 공이 능히 아버지가 응시하였던 답안을 줄줄 암송하니, 가은(稼隱) 성언근(成彦根)이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손녀와 공의 혼사를 의논하여 맺어줌.
8세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음. 서울에서 내려온 한 손님이 운(韻)을 뽑아 공을 시험하니, 공이 “내 나이 이제 여덟인데, 서울 사람은 첨 봤네.[兒年今八歲, 初見洛陽人]”라고 곧장 응수하였다고 함. 공이 친구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아버지 성렬이 공에게 바둑알을 입에 넣었다가 모조리 바깥으로 토해내게 하자, 이로부터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시를 짓기를 “300개의 자기(磁器) 바둑알 입에 넣었다 뱉어낸 후론, 아버님 가르침 평생토록 지켰네.[三百磁碁含復吐, 先君遺訓守平生]”라 하였음.
삼가례(三加禮)를 치른 후에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이 공을 위해 자사(字辭)를 지어 공을 권면함. 10여 년 동안이나 산에서 침식을 잊고 공부에 전념하여 사마시에 입격하니, 아버지 성렬이 팔영(八詠)을 지어 권면, 경계시킴. 부친상을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처리하고, 여가에 유고를 정리함.
공은 세도(世道)가 옛날과 같지 않음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서 류치명에게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1855년(철종6)에 류치명이 유배를 갈 때에 수철교(水鐵橋)까지 배종하였으나 류치명이 공의 어머니에게 병환이 있다는 이유로 만류하여 마침내 공은 집으로 돌아옴. 만년에는 소수서원에서 고을 선비들을 모아 놓고 재주에 따라 그들을 성취하게 하였으며, 1878(고종15)에는 냉산(冷疝)으로 누워있는 와중에서도 날마다 침상에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읽었음.
문집이 있음.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成均進士徐公墓碣銘」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