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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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8월 24일 (수) 01: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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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6년(영조2)~1799년(정조23).

자 정보(正甫). 호 사천(沙川). 생원(生員) 서만유(徐萬維)의 아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음.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독실하여, 책을 읽고 글자를 묻는 일 외에는 반드시 부친께 여쭈고 나서 행동을 결정하였음. 아버지 만유가 그런 공을 평하기를 “이 아이의 자성(資性)은 스승을 따라 학문을 해낼 수 있겠다.”고 함. 14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을 때에, 관 앞에서 호곡하고 애통해 하기를 충심으로 하였다가, 며칠이 지나자 혼절하기도 하였음.

같이 놀던 이웃 아이가 가난하여 겨울옷을 지어 입을 형편이 못되었는데, 공이 새로 지은 겨울옷을 벗어주니, 공의 어머니가 헌옷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하자, “저는 옷이 해지면 고쳐도 되지만, 저 아이는 고칠 방도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였다고 함.

같이 놀던 이웃 아이가 가난하여 겨울옷을 지어 입을 형편이 못되었는데, 공이 새로 지은 겨울옷을 벗어주니, 공의 어머니가 헌옷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하자, “저는 옷이 해지면 고쳐도 되지만, 저 아이는 고칠 방도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였다고 함.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더욱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여,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잘 미루어 체득하여 모심. 공이 노년에 모상(母喪)을 당하자, 여름에도 상복을 벗거나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옷을 두껍게 껴입거나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지 않았음.

공은 평소에 ‘장경(莊敬)’을 위주로 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한 글자는, 이 마음을 부지런히 경계시켜서 늘 깨어 있고 어둡지 않게 하는 것이니, 곧 마음을 다스리는 제일의 공부이다.”라고 하고, 아울러 일상(日常)의 행위에서 실천하고 익숙하게 하는 공부를 강조하였음.

일찍이 과거 공부를 한 적이 있었으나, 1762년(영조38) 이후에는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이후 대나무, 국화, 파초(芭蕉)를 심어 뜻을 깃들였고, 봄가을 경치가 좋을 때는 산책을 하며 시를 읊조리면서 담박한 마음을 지녔음.

공의 선조이자 경태(景泰) 연간의 유일(遺逸)로 명성이 있던 돈암(遯菴)의 유사(遺事)를 공의 족형(族兄)인 오산(梧山) 창재(昌載)와 더불어 수집하고, 당세의 큰 학자에게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청하기도 함. 또한 ������문중전수록(門中傳守錄)������을 편집하여, 초기 조상들이 남긴 시와 뇌문(誄文) 및 관련된 읍지와 묘지의 기록을 모으고 일록(日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함.

공은 홀로 영월(寧越)에 들어가 금강정(錦江亭)과 청령포(淸泠浦) 사이를 주유(周遊)하면서 단종(端宗) 관련 유적지를 보고 돌아오기도 함.

공은 독서에 있어 사서(四書)를 위주로 하고, 반드시 자구(字句)마다 정밀하게 공부하였음. 만년에는 대산(大山) 문하에 나아가 의례(疑禮)를 강론하였음.(������대산집������에 「答徐正甫昌鏡別紙」 등 논례(論禮)한 편지가 실려 있음) 또 박손경(朴孫慶)・유장원(柳長源)과 더불어 반복하여 고증하였음. 일찍이 거문고를 만들고는, 도잠(陶潛)의 ‘무현금(無絃琴)’의 뜻을 취하여 이를 “아금(啞琴)”이라 명명하며 회포를 달랬다고 함.

문집이 있음.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가 「處士徐公行錄」을 찬함.